작가가 뽑은 작가의 책

방현석-김인숙 [제국의 뒷길을 걷다]

구름뜰 2009. 4. 27. 19:00

작가가 뽑은 작가의 책 ⑮ 소설가 방현석 → 김인숙 『제국의 뒷길을 걷다』 [중앙일보]

논픽션 뒤의 ‘감춰진 사실’ 보여주는 픽션

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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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이 중국으로 처음 훌쩍 떠나버렸던 것은 소설집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를 펴낸 다음이었다. ‘떠나버렸다’고 생각한 것은 순전히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의 여운 탓이었다. 이 소설집은 위태로웠다.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한 등장인물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 위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소설의 인물들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작가가 먼저 구원의 밧줄을 던지지도 않았다. 읽는 동안은 아슬아슬했고 읽고 나서는 아득했다.

소설집 표제작의 주인공은 이혼녀도 미망인도 아니다. 이혼하기 위해 찾아가던 법원 앞 사거리에서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어버렸다. 그녀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그러나 그녀는 관계에 의해 부여되는 ‘보여지는’ 정체성에 도무지 관심이 없다. 대신 고집스럽게 자신의 내면을 응시한다. 희미하지만 뚜렷하게 관계에 대한 회의와 불신, 쓸쓸함이 엿보였다.

2005년 다롄에서 돌아온 김인숙을 꼬드겨 동남아시아 여행을 함께 떠났다. 베트남에 드나들던 내 발걸음에 관성이 붙어 그 이웃나라의 국경을 넘나들던 무렵이었다. 인도네시아·태국·베트남·필리핀을 여행하는 동안 김인숙은 중국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같이 여행을 갔던 다른 동업자들이 중국에 관해 질문을 던져도 아주 짧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남은 대답은 그녀의 여유로운 표정과 흔들리지 않는 발걸음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일행들이 너무나 힘든 일정에 비명을 지르며 그 일정을 짠 나에게 이를 갈았지만 김인숙은 태연자약했다.

그 여행에서 돌아온 뒤 김인숙은 다시 중국으로 떠났다. 이번에는 ‘떠났다’고 생각한 것은 여행에서 보았던 여유로움 때문이었다.

한 해 반을 베이징에서 살다 돌아온 김인숙이 펴낸 책이 『제국의 뒷길을 걷다』(문학동네, 2008)였다. 나는 여러 날 베이징 여행을 하듯 야금야금 읽으며 곳곳에서 감탄했다. 지금 다시 책을 펼쳐보니 이런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수없는 파괴와 수없는 건설에도 불구하고, 남은 것은 사라진 것의 기억을 안고 더욱 아름답다.” 그리고 이런 독후감도 메모되어 있다. ‘서태후-완룽-쑹칭링-원정설, 여성의 눈동자에 깃든 중국역사의 풍경.’

이 책은 픽션도 논픽션도 아니다. 이 책의 어느 페이지엔가 나는 이런 메모를 남겨두었다. ‘픽션은 논픽션의 반대가 아니라 논픽션의 힘이 다한 다음, 남아있는 진실을 보여주는 감추어진 사실이다.’

“잘못하다간 이 책이 대표작이 되겠다.” 김인숙에게 던졌던 농담이다. 그러나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유감없이 보여주는 김인숙의 섬세한 감수성과 인문적 소양, 도저한 역사적 상상력은 이제 겨우 사용되기 시작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방현석은=한국 문단에서 드물게 노동운동을 소재로 작품을 쓰는 소설가. 1988년 ‘실천문학’에 ‘내딛는 첫발은’을 발표하며 등단한 뒤 2003년 『존재의 형식』으로 제11회 오영수문학상과 제3회 황순원문학상을 받았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대표를 지내며 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의 아픈 역사적 기억을 담은 중편소설 ‘랍스터를 먹는 시간’을 내놨다. 단편영화 ‘무단횡단’의 시나리오 작가겸 감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