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전선 그녀의 전기-점선뎐
그는 아주 가끔, 1년에 한 세 번쯤 운전하면서 잠깐 노래를 흥얼거린다.
어떤 노래의 한 소절쯤을 부를 때도 있다.
그럴 때 나는 숨죽이고 그의 노래를 흡수하듯이 듣는다.
조수석에 앉아 앞만 보고 말없이 있는다. 무진장 행복한데도 한 번도 그걸 표현하지 않았다.
멍석 깔면 안 할까봐,
그보다도 한 번 말해버리면 그다음부터 그가 어색해 할까봐 그 자연스럼움이 변질될까봐.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극비리에 혼자서 내 생애의 절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그가 그걸 알았을까? 아니면 지금 그가 알까?
아! 다시는 나타날 수 없는 현상! 환상 같은 현실. 현실이었던 환상!그것이 우리의 생활이었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사자다. 나와 내 아들을 깨우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사자다.
먼지 속에 고요히 서서 우리를 깨우치다가 홀연 어느 가을날 하늘로 되돌아 갔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자-점선뎐중에서
그녀는 지난 3월 22일 별세했다.(향년 63세)
[점선뎐}은 박선생의 소개로 읽게 된 책이다.
(제목이 이렇게 붙여진건 그녀가 어릴때 외할머니 집에서 여성들의 전기인
옥단춘뎐, 춘향뎐 이 떠올라 그녀가 병상에서 생각해낸 책 제호다.)
그 이전에 좋은 생각 5월호에서 -칭찬의 힘- 이란
짧은 단상을 읽긴 했지만모르고 스쳐간 부분이었다.
책 분량이 두꺼워(400페이지정도) 제법 손맛도 나는 책이다.
나는 이책을 읽으면서 자꾸 나를 돌아 보게 된다.
천재 아니면 거의 바보같은,
(명석한 두뇌는 천재에 가까왔고 섬세하고 해맑았던 순수함은 바보를 닮았다 해야 할까)
우둔하리만치 자기 방식대로
매일 매일 자신의 삶을 창조해간 사람
그녀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특이한, 괴이한, 평범하지 않은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의 전형이라 생각될만큼 그녀는 독특하다!
좀더 피상적으로 본다면 ' 저사람은 왜 저럴까.'라며
두번 봐주기 쉽지 않은 인물일 수도 있다.
대학시절 동안 한번도 머리에 빗질을 하지 않았다거나
중성적인 얼굴이라 여성성은 거의 없는 듯이 산
아니 본인 스스로 의도한 아무도' 겁탈하고 싶지 않은 여성'이길 원했던,
주변의 사람들이 매력없는 이유로 결혼한 것이 싫어 안하고 있다가
선배의 일침(아이도 낳아봐야 하고 콩나물 값도 깍아봐야 하며 부모 신세 지지 말고
스스로 벌어서 물감 살 줄 알아야 정녕 예술하는 사람이다)에
결혼은 내가 이세상을 살기위해 치러야 하는 '벌금' 같은 것이라는
생각으로 해야겠다고 작정한다.
그런식으로 작정하고 물색한지 몇일만에 어느 선후배들과의 만남의 장소에서
라이브로 노래를 부르는 초면의 청년에게 반해서 노래가 끝나자 마자 청혼을 한다.
" 걸혼하자 나하고 결혼하자."
"좋다"
현장에서 청혼하고 그날 밤 여인숙에서 같이 잤다.
그후 20년동안 함께 살았다.
그 청년이 성이 김가라는 것은 자고 나서 일주일 쯤 후에 알았다.
나이가 나보다 세 살이 어리다는 사실도 그때서야 알았다.
그래도 그가 가난하고 집도 절도 없다는 것은 자기 직전에 알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내가 찾던 나의 동반자인 것이다.
내가 먼저한 청혼 - 점선뎐 중에서
영혼(정신)이 자유로왔던 그녀는
세상의 틀보다 자신의 틀(영역)을 확장시키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치열하게 열정적으로 살았다.
그들은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나는 그때도 그들처럼 관광버스를 타고 설악산 같은 델 가는 일은 치욕이라고 생각했다.
홀로 남겨져 수업도 없는 날, 주머니에 수학여행비를 넣고는 교문을 나섰다.
맨 먼저 책방에 들러서 선 채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현대사상]이라는 책을 집었다. (책 제목에 뽕가서)
책 두께가 거의 5센티미터에 이를 만큼 두꺼운 책이었다. 그걸 샀다.
밤새워 [현대사상]을 읽었다.
저자가 인도하는 대로 새롭게 현대철학을 관조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뭐 이런정도의 느낌뿐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을 질서 정연하게 정리하는 일은 중요하다.
생각하면서 세번을 읽었다.
그시절 나는 자신에게 질문하고 명쾌하게 대답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잠자리에 들어서 잠들기 전에 자신에게 질문하고 명료한 답을 제시해야만 잠이 왔다.
대답이 시원치 않으면 다시 일어나서 참고서적을 뒤적여서 막히는 부분에 대해
명료하게 답을 만들어내고서야 잠들었다.
대학시절 나는 늘 생각했다. 등록금은 이화여대에다 내지만 나는 세계속의 대학생이다.
나는 월드와이드 한 표준지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스로 공부할 목표를 세우고 혼자서 실천해 나갔다.
나는 지적인 영웅주의자였다.
밤마다 지구 위에 나를 세워놓고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나를 향해 질문해대는 상상을 하면서,
그것에 대해 대답하는 자신을 감상하면서 잠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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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시절 , 서양철학사를 꿰뚫어놓은 것이 내 생각의 기본 틀을 이루어 주었다.
그 기본 틀 위에다 무엇이든지 같다 붙여서 생각해가는 습관이 생겼다.
그렇게 생각하는 버릇은 수십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았다.
수학여행을 다녀와 교수님이 물었다. 교실이 아니라 교정을 거닐면서
"너는 그동안 무얼 했느냐?"
"현대사상이라는 책을 세 번 읽으면서 철학의 체계를 현대적으로 정리했습니다"
여행을 가지 않고 여행 대신 머릿속을 정리하는 독서를 선택하는 생활습관은
그때부터 평생 동안 이어졌다. 나는 늘 내 머릿속을 다스리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머릿속이 편안하면 아무리 좁은 공간에 박혀서 지내도
우주을 다 가진듯이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협소공포증은 상상력의 부족 늑 두뇌의 힘이 부족한 사람이 걸리는 정신병이라고 생각했다
철학 책을 읽는 것은 머리의 힘을 기르는 데 아주 좋은 두뇌체조라고 생각했다.
철학 책뿐만 아니라 독서는 인간이 발명한 행동 중에서
가장 효율적인 생활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쓸 때 인간은 최선의 상태에 있는 자신을 불특정 다수의 인간들에게
전달하려는 의지에 불탄다.
이것이 최선의 인류애라고 나는 생각한다.
책을 읽는 자들은 이미 천년전에 죽은 다른 민족의 조상에게까지
은총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비록 인류문명의 오지에서 태어난 약소국
국민이지만 머릿속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몸은 중요 무대에 서 있지 못하지만 머리 만은 지구의 중심에서 숨 쉰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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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젊은 시절은 그런 영웅주의 적인 행동으로 꽉 차 있었다.
그런 생활은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제적당하면서 끝났다.
나는 무능해 보이는 데다가 오만하기까지 한 비호감 대표주자였다.
그런 이화여대 대학원에서조차 중간에 퇴학을 당했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철학적 사고체계를 구축하고 말고 하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는 듯한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감성적인 세계성 같은 것 또한 아무런 빛을 발하지 못한다는 점을 그 즉시 느꼈다.
일대 혼란이 왔다. 죽음을 생각할 만큼 큰 혼란이 왔다.
겨우 영어 통역과 번역을 하면서 연명했다. 그러다 홀로 나의 길을 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 자신이 가장 원하는 짓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철학적인 사고체계 같은 거는 다 바다에 쳐넣어 버리고 그림속으로들어갔다.
단순히 그림을 그리다가 죽겠다.
골방속에서 다시영웅주의자로서 홀로 행복해하면서 살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미술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미술이론서를 먼저 읽었다.
그림공부를 시작하고는 오히려 책을 읽지 않고 그림만 그렸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생각하는 습관이 다시 되살아났다.
그러니까 미술이론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철학의 발달과 역사의 진행과 인류 의식의 변화가 다 함께 섞여서 흐르는
커다란 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머릿속의 지식들은 스스로 발효하면서 이미습득한 지식들을 종합하고 있었다.
이런 정신활동으로 나는 내 그림을 강력하게 이론적으로 변호하는 역할까지 하면서
내 멋대로 그림을 그려댔다. 이것이 예전에 읽었던 책들이 나에게 준 힘이다.
오래전에 살았던 인류의 어른들이 내게 책을 통해 전해준 그들이 힘이다.
결국 그림도 생각을 벗어난 행위는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생각을 더 많이 해서 가지게 되는 해석마저 제거해야 그림이 그려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은 수학여행 안 가고 책 읽던 습관이 그림을 그리는 힘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젊어서 두뇌체조를 열심히 한 것이 평생의 정신적인 힘이 되었음을
그림을 그리면서 천천히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왜 그 책을 읽었을까- 점선뎐중에서
휴우.
읽고 또 읽어도 매력적이다.
그녀의 기질을 가장 잘 나타낸 부분이다.
처음에 읽었을때는 숨이 가쁠정도로 빠르게 읽었다.
그리고 다시 되새김질을 해서 읽고 또 읽었다.
독서에 대해 이렇게 명쾌하고 정확하게 표현해 낸 글을 읽은 적이 없다.
이글을 읽으면서 오히려 체계적으로 정리 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닮아야 할 배워야 할 부분들이 책 곳곳에서 나를 붙잡았다.
길지 않은 문장인데
그녀의 정신세계와 삶의자세가 그녀의 역량그대로 글 속에 드러나 있다.
가히 부럽고 존경스럽다.
읽기 시작한지 2주 정도 되었는데 2번 읽고도
손에서 놓질 못하고 곁에 두고 수시로 되새김질 하면서 읽는다.
앞으로도 그럴것 같다.
말로 글로 다 정리가 쉽지 않은 감동을 주는 책이다.
중성적인데다 약간 괴기까지 해서 친근감이 드는 외모는 아니지만
책을 읽다보면 그녀의 바다에서 맘껏 유영하는 나를 보게 된다.
이 자유로운 영혼이 아름다워보이는 이유다.
그녀의 말처럼 그녀는 가고 없지만 책으로 만날 수 있으니
독서는 은총이고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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