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층층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뜻한 연분도
한 방울 현란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유치환 - 행복
청마는 해방과 함께 통영여중 국어교사로 부임하게 되고 그곳에서
첫눈에 이영도(시조 시인 호는 정운)를 사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음안에 깊은 그림자로 자리잡은 영도,,
그당시 영도는 남편과 사별하고 딸하나를 키우고 있었고 가사선생님이었다고 합니다.
1947년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영도에게 편지를 보낸 청마,
그러기를 3년여.. 마침내 영도의 마음도 움직여 이들의 플라토닉 러브는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하나 청마가 기혼자였기에 이들의 만남은 거북하고 안타깝기만 했고,
청마는 1967년 2월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하루도빠지지 않고 20년 동안 편지를 계속 보냈고
영도는 그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6·25전쟁 이전 것은 전쟁 때 불타 버렸고
청마가 사망했을 때 남은 편지는 5,000여 통이었다고 합니다.
<주간한국>이 이들의 '아프고도 애틋한 관계'를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으로 실은 것이 계기가 되어 청마의 편지 5,000여 통 중 200통을 추려
단행본으로 엮었다고 합니다.
이 청마의 사랑 편지가 책으로 나오자 그날로 서점들의 주문이 밀어닥쳤고
베스트셀러가 되어 무명 중앙출판사는 대번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땅히 서한집의 인세는 청마의 유족에게 돌아가야할 것이나,
정운은 시전문지'현대시학'에 '작품상'기금으로 기탁 운영해오다 끝을 맺지 못하고,
76년 3월6일 예순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승에서는 맺지 못한 사랑 저승에서는 맺었을 지.
문학은, 사랑은 이루어 질 수 없을 때, 더 아름다우며 더 숭고해지는 건지.
아파야만 가능한 것인지....
청마가 이영도를 만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청마일 수 있었을 지..
오면 민망하고
아니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기울여 기다리며
바라기도 하여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루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보다가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리라
정운 이영도 - 무제
'무제'라는 제목만큼 성의 없음이 또 있을가 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
이 시를 읽다보면 '무제' 말고 붙일 만한 제목이 없었음을 보게 됩니다.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하고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정운 이영도 -탑(塔)
사랑은 미완성으로 완성되는 것인지.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이 눈물겹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