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 - 이상 수필
어서 - 차라리- 어두워 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벽촌僻村의 여름날은 지루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동에 팔봉산.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 - 이 벌판은 어쩌자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 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 먹었노?
농가農家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한 십여호식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벽,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은 호박넝물,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나. 어제 보던 댑싸리 나무, 오늘도 보는 김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신둥이, 검둥이 해도 백도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내려쪼인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 염서계속炎署繫束이다.
나는 아침을 먹었다.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무작정 널따란 백지白紙같은 '오늘'이라는 것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면서, 무슨 기사記事라도 좋으니 강요强要한다. 나는 무엇이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연구해야 된다. 그럼 - 나는 최 서방네 집 사랑 툇마루로 장기나 두러 갈까? 그것 좋다. 최서방은 들에 나갔다. 최 서방네 사랑에는 아무도 없나보다. 최 서방의 조카가 낮잠을 잔다. - 아하-내가 아침을 먹은 것은 열시나 지난 후니까. 최 서방의 조카로서는 낮잠 잘 시간에 틀림없다.
나는 최 서방의 조카를 깨워가지고, 장기를 한 팔 벌이기로 한다. 최 서방의 조카와 열 번 두면 열 번 내가 이긴다. 최 서방의 조카로서는, 그러니까 나와 장기 둔다는 것 그것부터가 권태다. 밤낮 두어야 마찬가질 바에는 안 두는 것이 차라리 나았지. -그러나 안 두면 또 무엇을 하나? 둘 밖에 없다. 지는 것도 권태거늘. 이기는 것이 어찌 권태 아닐 수 있으랴? 열 번 두어서 열 번 내리 이기는 장난이란 열 번 지는 이상으로 싱거운 장난이다. 나는 참 싱거워서 견딜 수 없다.
한 번쯤 져 주리라. 나는 한참 생각하는 체하다가 슬그머니 위험한 자리에 장기조각을 갖다 놓는다. 최 서방의 조카는 하품을 쓱 한 번 하더니, 이윽고 둔다는 것이 딴전이다. 으레 질 것이니까, 골치 아프게 수를 보고 어쩌고 하기도 싫다는 사상思想이리라.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장기를 갖다 놓고는, 그저 얼른얼른 끝을 내어 져 줄 만큼 져 주면, 이 상승장군商勝將軍은 이 압도적 권태를 이기지 못해 제출물에 가버리겠지 하는 사상이리라. 가고 나면 또 낮잠이나 잘 작정이리라.
나는 부득이 또 이긴다. 인제 그만 두잔다. 물론, 그만 두는 수밖에 없다. 일부러 져준다는 것조차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왜 최 서방의 조카처럼 아주 영영 방심放心 상태가 되어버릴 수가 없나? 이 질식窒息할 것 같은 권태 속에서도 사세些細한 승부에 구속을 받나? 아주 바보가 되는 수는 없나? 내게 남아 있는 이 치사스러운 인각 이욕利慾이 다시없이 밉다. 나는 이 마지막 것을 면免해야 한다 권태를 인식하는 신경마저 버리고, 완전히 허탈虛脫해 버려야 한다.
나는 개울가로 간다. 가물로 하여 너무나 빈약한 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 뼈처럼 앙상한 물줄기가 왜 소리를 치지 않나? 너무 덥다. 나뭇잎들이 다 축 늘어져서 허덕허덕하도록 덥다. 이렇게 더우니 시냇물인들 서늘한 소리를 내어보는 재간도 없으리다. 나는 그 물가에 앉는다. 앉아서 자- 무슨 제목으로 나는 사색思索해야 할 것 인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물론 아무런 제목도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 생각 말기로 하자. 그저 한량限量 없이 넓은 초록색 벌판, 지평선, 아무리 변화하여 보았댔자 결국 치열한 곡예의 역域을 벗어나지 않은 구름, 이런 것을 건너다 본다.
지구 표면적의 백분의 구십구가 이 공포의 초록색이리라. 그렇다면 지구야말로 너무나 단조무미單調無味한 채색이다. 도회에는 초록이 드물다. 나는 처음 여기 표착하였을 때, 이 선선한 초록빛에 놀랐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닷새가 못 되어서 이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초록색은 조물주의 몰취미와 신경의 조잡성으로 말미암은 무미건조한 지구의 여백인 것을 발견하고,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작정으로 저렇게 퍼러냐. 하루 온종일 저 푸른 빛은 아무 짓도 하지 않은다. 오직 그 푸른 것에 백치와 같이 만족하면서 푸른 채로 있다. 이윽고 밤이 오면, 또 거대한 구덩이처럼 빛을 잃어버리고 소리도 없이 잔다. 이 무슨 거대한 겸손이냐. 이윽고 겨울이 오면 초록은 실색失色한다. 그러나 그것은 남루를 갈기갈기 찢는 것과 다름아닌 추악한 색채로 변하는 것이다. 한겨울을 두고 이 황막하고 추악한 별판을 바라보고 지내면서, 그래도 자살 민절하지 않는 농민들은 불쌍하기도 하려니와 거대한 천치다.
그들의 일생이 또한 이 벌판처럼 단조한 권태 일색으로 도포된 것이리라. 일할 때는 초록 벌판처럼 더워서 숨이 칵칵 막히게 싱거울 것이요. 일하지 않을 때에는 황원처럼 거칠고 구주레하게 싱거울 것이다. 그들에게는 흥분이 없다. 벌판에 벼락이 떨어져도 그것은 뇌성끝에 가끔 있는 다반사에 지나지 않은다. 촌동이 범에게 물려가도, 그것은 맹수가 사는 산촌에 가끔 있는 신벌神罰에 지나지 않는다.
-- 그들에게 희망이 있던가. 가을에 곡식이익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희망은 아니다. 본능이다. 내일. 내일도 오늘 하던 계속의 일을 해야지. 이 끝없는 권태의 내일은 왜 이렇게 끝없이 있나?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을 생각할 줄 모른다. 간혹 그런 의혹이 전광과 같이 그들의 흉리를 스치는 일이 있잇어도, 다음 순간 하루의 노역으로 말미암아 잠이 오고 만다. 그러니 농민은 참 불행하도다. 그럼 - 이 흉악한 권태를 자각할 줄 아는 나는 얼마나 행복된가
댑싸리나무도 축 늘어졌다. 물은 흐르면서 가끔 웅덩이를 만나면 썩는다. 내가 앉아 있는 데는 그런 웅덩이 옆이다. 내 앞에서 물은 조용히 썩는다. 낮닭 우는 소리가 무던히 한가롭다. 어제도 울던 낮닭이 오늘도 또 울었다는 외에 아무 흥미도 없다.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다. 다만 우연히 귀에 들려왔으니까 그저 들었을 뿐이다.
닭은 그래도 새벽, 낮으로 울기나 한다. 그러나 이 동리의 개들은 짖지를 않는다. 그러면 모두 벙어리 개들인가. 아니다. 그 증거로는 이 동리 사람 아닌 내가 돌팔매질을 하면서 위협하면, 심리나 달아나면서 나를 돌아보고 짖는다.
그렇건만 내가 아무 그런 위험한 짓을 하지 않고 지나가면, 천리나 먼 데서 온 외인, 더구나 안면이 이처럼 창백하고 봉발이 작소를 이룬 기이한 풍모를 쳐다보면서도 짖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어째서 여기 개들은 나를 보고 짖지를 않을까? 세상에도 희귀한 겸한 겁쟁이 개들도 다 많다. 이 겁쟁이 개들은 이런 나를 보고도 짖지를 않으니, 그럼 대체 무엇을 보아야 짖으랴?
그들은 짖을 일이 없다. 여인은 이곳에 오지 않는다. 오지 않을 뿐더러 국도 연변에 있지 않은 이 촌락을 그들이 지나갈 일도 엇다. 가끔 이웃 마을의 김서방이 온다. 그러나 그는 여기 최 서방과 똑같은 복장과 피부색과 사투리를 가졌으니, 개들이 짖어 무엇하랴. 이 빈촌에는 도적이 없다. 인정人情있는 도적이면 여기 너무나 빈한貧寒한 새악시들을 위하여, 훔친 바 비녀나 반지를 가만히 놓고 가지 않으면 안 되리라. 도적에게는 이 마을은 도적의 도심盜心을 도적맞기 쉬운 위험한 지대리라.
그러니 실로 개들이 무엇을 보고 짖으랴. 개들은 너무도 오랫동안- 아마 그 출생 당시부터- 짖는 버릇을 포기한 채 지내왔다. 몇 대를 두고 짖지 않은 이곳 견족들은 드디어 짖는다는 본성을 상실하고 만 것이리라. 인제는 돌이나 나무토막으로 얻어맞아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파야 겨우 짖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본능은 인간에게도 있으니. 특히 개의 특징으로 쳐 둘 것은 못 되리라. 개들은 대개 제가 길리우고 있는 집 문간에 가 앉아서 밥이면 밤잠, 낮이면 낮잠을 잔다. 왜? 그들은 수위할 아무 대상도 없으니까다.
최 서방네 집 개가 이리로 온다. 그것을 김 서방네 집 개가 발견하고, 일어나서 영접한다. 그러나 영접해 본댔자 할 일이 없다. 양구良久에 그들은 헤어진다. 설레설레 길을 걸어 본다. 밤낮 다니던 길. 그 길에는 아무것도 떨어진 것이 없다. 촌민들은 한여름 보리와 조를 먹는다 .반찬은 날된장, 풋고추다. 그러니 그들의 부엌에조차 남는 것이 없겠거늘, 하물며 길가에 무엇이 족히 떨어져 있을수 있으랴. 길을 걸어본댔자 소득이 없다. 낮잠이나 자자, 그리하여 개들은 천분의 수위술을 망각하고 낮잠에 탐닉하여 버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타락하고 말았다.
슬픈 일이다. 짖을 줄 모르는 벙어리 개, 지킬 줄 모르는 게으름뱅이 개, 바보 개들은 복 날 개장국을 끓여 먹기 위하여 촌민의 희생이 된다. 그러나 불쌍한 개들은 음력陰歷도 모르니, 복날은 몇 날이나 남았나 전연全然 알 길이 없다. 이 마을에는 신문도 오지 않는다. --오관이 모조리 박탈 된 것이나 다름없다. 답답한 하늘, 답답한 지평선, 답답한 풍경, 답답한 풍속風俗 가운데서 나는 이리 디굴 저리 디굴 굴고 싶은 만치 답답해하고 지내야만 된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 이상으로 괴로운 상태가 또 있을까. 인간은 병석에서도 생각한다. 아니, 병석에서는 더욱 많이 생각하는 법이다.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하였을 때, 그의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리라. 그리하여 망쇄할 때보다도 몇 매나 자신의 내면을 상찰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특질이요. 질환인 자의식 과잉은 이런 권태치 않을 수 없는 권태 계급의 철저한 권태로 말미암음이다. 육체적 한산, 전신적 권태, 이것을 면할 수 없는 계급이 자의식 과잉過剩의 절정을 표시한다.
그러나 지금 이 개울가에 앉은 나에게는 자의식 과잉조차가 폐쇄되었다. 이렇게 한산한데, 이렇게 극도의 권태가 있는데,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기를 주저한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 어제까지도 죽는 것을 생각하는 것 하나만은 즐거웠다. 그러나 오늘 그것조차가 귀찮다. 그러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눈 뜬 채 졸기로하자.
--중략,,
나는 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와서 세수를 하기로 한다. 나는 일어나서 오던 길을 돌치는 도중에서 교미하는 개 한쌍을 만났다. 그러나 인공의 기교가 없는 축류의 교미는, 풍경이 권태 그것인 것 같이 권태 그것이다. 동리 동해들에게도 젊은 촌부들에게도 흥미의 대상이 못되는 이 개들의 교미는, 또한 내게 있어서도 흥미의 대상이 되지 않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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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수를 해 본다. 물조차가 미지근하다. 물조차가 이 무지한 더위에는 견딜 수 없었나 보다. 그러나 세수의 관례대로 세수를 마친다. 그러고 호박넝쿨이 축 늘어진 울타리 밑 호박넝쿨의 뿌리 돋친 데를 찾아서 그 물을 준다. 너라도 좀 생기를 내라고
땀내 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고 툇마루에 걸터 앉았자니까, 내가 세수할 때 내 곁에 늘어섰던 주인집 아이들 넷이, 제각기 나를 본받아 그 대야를 사용하여 세수를 한다. 저 애들도 더워서 저러는구나, 하였더니 그렇지 않다. 그 애들도 나처럼 일거수일투족을 어찌하였으면 좋을까 당황해 하고 있는 권태들이었다. 다만 내가 세수하는 것을 보고, 그럼 우리도 저 사람처럼 세수나 해볼까 하고 따라서 세수를 해보았다는 데 지나지 않는다.
원숭이가 사람 흉내를 내는 이 내 눈에는 참 밉다. 어쩌자고 여기 아이들이 내 흉내를 내는 것일까? 귀여운 촌동들을 원숭이를 만들어서는 안된다.
--마당에서 밥을 먹으면, 머리 위에서 그 무수한 별들이 야단이다. 저것은 또 어쩌라는 것인가. 내게는 별이 천문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시상詩想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향기도 촉감도 없는 절대권태의 도달할 수 없는 영원한 피안이다. 별조차가 이렇게 싱겁다.
저녁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보면, 집집에서는 모깃불의 연기가 한창이다. 그들은 마당에서 멍석을 펴고 잔다. 별을 쳐다보면서 잔다. 그러나 그들은 별을 보지 않는다. 그 중거로는 그들은 멍석에 눕자마자 눈을 감는다. 그리고는 눈을 감자마자 쿨쿨 잠이 든다. 별은 그들과 관계없다.
나는 소화를 촉진시키느라고 길을 왔다갔다 한다. 돌칠 적마다 멍석 위에 누운 사람의 수가 늘어간다.
이것이 시체와 무엇이 다를까? 먹고 잘 줄 아는 시체 - 나는 이런 실례로운 생각을 정지해야만 되겠다. 그리고 나도 가서 자야겠다.
방에 돌아와 나는 나를 살펴본다. 모든 것에서 절연絶緣된 지금 내 생활 자살의 단서조차를 찾을 길이 없는 지금의 내 생활은, 과연 권태의 극極 권태倦怠 그것이다.
그렇건만 내일이라는 것이 있다. 다시는 날이 새지 않는 것 같기도 한 밤 저쪽에 또 내일이라는 놈이 한 개 버티고 서 있다. 마치 흉맹凶猛한 형리刑吏처럼- 나는 그 형리를 피할 수 없다. 오늘이 되어버린 내일 속에서, 또 나는 질식할 만치 심심해해야 되고, 기막힐 만치 답답해해야 된다.
그럼 오늘 하루를 나는 어떻게 지냈는가. 이런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냥 자자. 자다가 불행히- 아니 다행히 또 깨거든, 최 서방의 조카와 장기나 또 한 판 두지. 웅덩이에 가서 송사리를 볼 수 있고, - 몇 가지 안 남은 기억을 소처럼- 반추하면서 끝없는 나태를 즐기는 방법도 있지 않으냐.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 평상平常에 불을 초조焦燥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들 불이 있느냐. 없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暗黑은 암흑인 이상, 이 좁은 방 것이나 우주에 꽉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다. 나는 이 대소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 그것이 또 창밖에 등대等待하고 있은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심이월 십구일 미명未明 동경東京에서
30년대 모더니즘의 대표적 작가 이상. 이글은 폐병으로 사망(37년)하기 직전 36년 동경에서 쓴 글이다.
시골 '성천'에 대한 기억을 이국땅에서 각혈 발열등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그곳에서
자신에 대한 불안감과 적대감을 '성천'의 권태로 나타내고 있다.
성천의 권태가 아니라 작가의 권태로 볼 수 있는 글이다.
죽음을 앞두고,권태! 라고 밖에 표현 할 수 없었던 27살에 요절한 천재작가
언어의 조응력이 뛰어나서, 몇 번을 읽어도 맛이나는 글이다.
역설, 반어, 위트, 유머, 자유자재한 어휘력과 풍부한 사고력, 상상력까지
생략된 부분에는 웅덩이 속의 송사리 떼를 들여다 보는 모습과, 소의 되새김을 보면서
식욕의 즐거움조차를 냉대할 수 있는 지상최대의 권태자라고 하는 부분도 있다.
얼마나 권태에 질렸길래 이미 위胃에 들어간 식물을 다시 게워,
그 시금털털한 반소화물半消化勿의 미각을 역설적으로 향락享樂하는 체 해 보임이리요?
라는 탁월한 문장도 있다.그러면서 소의 체구가 크면 클수록 권태도 크고 슬프다는 이야기,
동네 아이들이 대변보기 놀이를 보면서도
조물주여 이들을 위하여 풍경과 완구를 주소서 하는 부분도 있다.
아침부터 저녁 잠자리에 들기까지의 성천 풍경이 자유자재한 작가의 심상으로 풀어져 있다.
개 이야기 부분도 재밌다.
잠도 오지 않았을 이국의 추운 겨울밤, 미명의 새벽까지 일기처럼 성천의 더운 여름을 쓴것,
극권태라고 했지만 분열된 자아와 탈출구를 찾고 싶어하는, 탈출하지 못하는 현실. 실망, 환멸,
흉악하게 까지 나태낸 권태,, 흉맹한 형리라고도 표현한 내일..
아무것도 자각하고 싶지 않은 자신을 향한 절규같기도 하고..
어려운 작품이지만 읽을 수록 좋아서 올려 봅니다.
즐감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