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향기

대나무의 비애..

구름뜰 2010. 7. 2. 09:24

 

 

사철푸르고 곧게자라서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

"그 사람 대쪽 같다"라는 말은 그 성품이 올곧다는 표현으로 가장 적절한 비유다.

파죽지세破竹之勢)는 대나무를 쪼개는 기새로 승리할 때를 이름이다.

대나무에 꽃이 피면 옛사람들은 흉조의 상징이라고 나라걱정을 했다는 얘기도 있다 

가뭄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설도 있고, 땅의 지력이 쇠하여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꽃을 피운다는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실재로 밝혀진 바는 없다고 한다.

푸르름에 휘지도 않아 옛 선비들은 유독 사군자 중에서도 대나무의 기상을 높이 여겼음을 

고전을  통해서도 볼수있다.

 

내 고향 마을은 "죽림리"라는 명칭으로 대 竹자에 수풀林 자를 쓰고 있다. 마을에 대숲이 있는데,

그 숲에 들면 댓잎들이 바람에 쓸리는 듯 부딪는 소리가 독특했던 기억이 있다.

사각사각 아니면, 사륵사륵 이라는 표현이 맞을지, 언제나 그 안에서면 마른날은 웅숭한 듯 했고,

비온날은 상큼하고 상냥한것 같기도 했던 대숲엔 언제나 소리가 있었다. 

그 숲엘 이맘때면 유독 자주갔는데,  마을에서 한 그루 뿐인 살구나무가 대숲이 있기 때문이었다.

비내린 날, 바람이라도 있는 날이면, 살구가 더 많이 떨어져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동생과 달려갔던 곳,,

그 습한 대숲의 기운, 다른 숲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독특한 소리..소리들..

 

어제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칠곡휴게소에서 본 대나무 덕분에 

이 아침 단상에서 고향마을 대숲의  추억까지 길어올리게 된다.

 

 

칠곡휴계소 자판기 커피 판매소 앞에는 데크목 벤치가 몇개 있다.

지대가 높아서 커피를 마시며 건너편 산을 조망하기에 좋은 곳이다. 

어제처럼 가끔 비오는 날 지나칠때면 건너편 산허리께까지 운무가 내려오는데

하늘과 함께 산빛이 워낙 변화무쌍한 때라 흐린날 지나칠때면 가끔 들르는 곳이다. 사진 욕심에.

 

커피를 뽑아들고 보던대로 맞은 편 산자락을 보던 참이었다.

휴게소 화단 회색빛 축대너머는 대나무 화단이었는데 콘크리트 울타리를 넘어와서 자라고 있는

어린 대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띄었다. 아마도 죽순으로 뿌리를 내린것이 쑥숙 커가는 것 같았다.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래쪽으로 내려다 봤을때 축대 이음새부분에 또 한그루가 더 있었다. 

틈새를 비집고 밖으로 나와 자라고 있었지만 그 뿌리는 축대 안쪽에다 두고 있었는데,

안에다 둔 뿌리에서  밖으로 나온 모습이라니.

수직으로 자라는 제 본성에 그대로 컸다면 축대끝부분이 붙었으므로 이 나무는 더 잘랄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는 살수 없는 환경이어서 고민 했을 테고, 안으로 또는 밖으로 휘어질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별 생각 없이 보다가 이렇게라도 살아남은 대나무를 보니 애처럽기도 하고, 오죽했으면 싶기도 하고, 

환경이란 얼마나 무서운지  본성을 거스르고도 살아야 하는 것들의 비애랄까..

환경에 영향 받지 않고, 본성 그대로 살아가는 자연물도 그러고 보면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

생명체의 특권이라면 말이 될까. 살아야 하니까. 살고 봐야 하니까 라는 생각앞에선  무슨 말을 할까.

절개의 표상이니 죽어야 마땅하다고 누가 얘기 할 수 있을까. 감히.. 

그렇더라도 사람이면 대나무 같은 체통으로 인정받았던 사람이라면  이 운명을 어찌 헤쳐냈을까. 

혼자서 별 생각을 다 해 보았다. 

 

 

 

조지훈은 지조론에서 지조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 고귀한 투쟁이라고 했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고 교양인의 것이라고, 선비나 지도자의 절개는 목숨과 같다고 했다.

시장 상인이나 술집 기생들은 절개를 소홀히 해도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지도자는 선비는 절대로 생명처럼 지키고 가져야 하는 것이 절개라고 했다.

자연물로 본성을 거스른 모습을 보는 것은 독특한 현상이라고 봐 줄수 있지만,

사람으로 자신의 이해관계에만 연연하여 구복口服과 명리名利만 취하는 모습은   

이 대나무 만큼 애처로울수도 이틋할수도 없을 것이다.   

 

살기위해 휜대나무를 보면서 잘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보게된다.

대쪽같은 성품도 환경에 따라서 변절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내 편리에 따라 나도 저런 모습일 때가 순간 순간 얼마나 많았을까.  

환경탓하며 살다보면 휘어지고 굽어지느라 제 본성은 잊은채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