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校正)지를 보면서...
'방학이다!'싶은 마음에 게으름도 부려보고
내 마음가는 대로 느긋이 즐기고 싶었는데
일 복이 많은건지 교정 볼 일이 생겼다.
교정은 워낙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어서 몰입하다 보면
작품에 대한 이해도는 절로 높아지고 애매한 용어나 맞춤법 뛰워쓰기 등
사전을 통해서도 저절로 공부가 되는 아주 남는 것이 많은! 매력적인 작업이다.
내겐 교정지에 얽힌 잊지못할 추억이 있다.
한 5년 쯤 된 일이다.
동인지 발간을 앞두고 동인들과 모여서 한나절 내도록 교정 작업을 했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시간쯤에야 끝났고
나는 원고를 일호봉투에 넣고 사무실을 나섰다.
동인과 좌석버스에 올랐고, 차에서 내릴때까지
즐거운 담소로 다른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불길한 예감이 휘익~ 바람처럼 내 주변을 맴도는 것 같은,
솔직이 귀신이 덮치는 것 같은 영감인지 뭔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내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다는 허전함과 동시에 그것이 원고라는 것을 깨닫는
그 착나적 시간의 오싹함까지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났다.
역시나 지금 생각해도 다시 경험해보고 싶지 않은 기분 나쁜 상황이다.
버스는 떠났고,
친구는 못찾으면 밤을 새서라도 다시 교정을 봐줄테니 걱정말라며 나를 위로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정말 정신 차리고 싶은데 차려지지 않은 황망한 상황.
그 자리에 서서 발만 동동 구르다 버스회사에 전화를 한 것은
행선지가 같은 그쪽 방향 버스를 몇 대나 보낸 뒤였다.
버스에 몸을 싣고 그 버스가 돌아나오는 길목 어디메쯤
어느 어둡고 낯선 마을에 내려서 반대편 돌아나오는 버스를 기다리던일,
그랬지만 그 기사로부터 내가 탄 것은 기억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아득함..
이것이 꿈이라면,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원고를 찾은 곳은 엉뚱한 곳 이었다.
사무실 문을 잠그면서 손에 든 원고를 바닥에 내려놓고
잠근 뒤 그냥 돌아서 나온 거였다.
잠시, 아주 잠시 정신을 엉뚱한 대다 둔 과오로 내가 치른 마음고생!을 생각하면...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이 하는 일이 잘못되었을 때 엄창난 파장이 생길수 있다면
이런 한순간이라도 신중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특히 의사나 은행원 등, 순간의 실수가 다른 사람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는 일이라면 말해 무엇하리.. .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그 후로 내가 신중히 대하는 것은 역시나 출판물과 관련한 원고들이다.
책이라면 구할 수 있지만 교정본은 하나 뿐인 미완의 책이니 더욱 그렇다.
더군다니 교정 다 보고 난 것은 말이 필요 없다.
어쨌거나 결과는 해피엔딩 이었지만..악몽이어도 좋으니 깨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섬뜩한 실수를 다시 경험해 보지 않았으니.. 그 실수는 병가지상사가 되었다..ㅎㅎ
내가 하는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의 파장을 생각하면
작은것에서라도 섬세한 부분들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