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향기

박완서선생님의 별세소식을 접하며...

구름뜰 2011. 1. 22. 10:44

 

무심코 켬퓨터를 켰다.

'박완서 별세'라는 활자가 포털 검색창 위 첫 줄 첫단어로 박혀있다. 

"아이고, 어쩌나!"나도 모르게 곡(哭) 같은 탄성이 터졌다. 

머리를 한대 얻어 맞은들 이런 기분일까.

그동안 암으로 투병중인 줄도 몰랐다. 

당신만은 팔순, 구순이 되셔도 펜을 놓지 않으실 어른이시어서 그저 장수하시기만을 바랬었는데..

 

제작년 어린이날인가는 박경리 선생님이 떠나셨고,

작년 삼월에는 법정스님이 떠나셨고,

이 시대의 획을 그었던 큰 문인들이 떠남,

무언가 큰 것이 내안에서 빠져나간 허전함이 느껴지는 일들이다.

 

아무리 배고파도  더 이상 채울수 없는 허기를 인정하는 기분이랄까.

이기적인 것 같지만 솔직히 그런 기분이다.

그분들로 인해 채운 양식을 생각하면 그 동안의 작품들로도 모자라지 않지만

아니 넘치지만, 그래도 그래도 더 오래 더 많이 생산해 주시기를

무한에너지 무한 지성의 특혜를 독자로서 언제까지나 

누리고 싶은 욕심만  앞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서울대 국문학과를 입학한 해에 6.25가 발생하여 그 길로 학업도 접어야 했던

개인적으로 불운한 세대이셨지만, 전쟁경험을 어떤 작가보다도 진정성있게 녹여내셨고,,

그런 그분의 필력 덕분에 선생님의 독자였다면 누구나 가까이에서

육성을 듣는 느낌으로 파헤쳐진 속내를 듣는 느낌으로 읽은 글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선생님 삶중에서 제일로 큰 울림으로 와 닿았던 것은 

접어둘 수 밖에 없었던 학업에 대한 이음줄을 시대적 상황에 순응,

결혼하여 아이를 다섯이나 낳고, 살림하시다 마흔이던 해에 '나목'으로 등단하셨다는 부분이었다.

선생님의 삶이 그시절 (1970년) 여성에게 던진 화두가 얼마나 컸을지.

나는 한참 후세대지만 삼십대시절 선생님의 문학을 접하면서 

개인적으로 얼마나 반가운 롤모델이었는지 모른다. .

 

 

줌마로 산 세월이 그동안의 소질을 곰삭여낸 기간이었다는 생각,

감칠맛 나는 작품들, , 입에 착착 붙고, 소화는 물론 배설의 카타르시스까지 느낄수 있었던!

수많은 문학도들에게 무한 가능성을 던져주셨던 

큰 희망의 등불 같은 분으로 더 와 닿았던 분이셨다.

당신이 준 이런 등대같은 메세지를 정작 당신은 아셨을지..

 

'엄마의 말뚝'이라는 책을 처음 접했을 때의 감동도 잊을 수가 없다.

속이 후련하도록 갈필을 펼친 글을 읽으면서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 

누군들 선생님 작품을 읽다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마는.

그 어떤 수사로도 표현할 수 없는 선생님만의 개성 넘치는 글들..

읽는 내도록 즐거운 만남, 통쾌한 기쁨까지..

바로 곁에계신 선생님을 느끼는 그런 작품들 이었다. 

 

'그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그 여자네 집' '그 남자네 집'  '호미'에서 '친절한 복희씨'와 작년에 나온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까지 신간이 나올때마다. 

이번에는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셨을까. 어떤 메세지을 주실까.

그렇게 기대하며 찾아 읽던 그 설렘.

이제는 맛 볼수 없게 되었지만, 영원히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어른이시다.

 

스무살적에 만난 법정스님과,

삼십대에 만난 박완서 선생님.

내 영혼의 멘토 셨던 분들..

정신의 양식을 주셨던 어머니 같고 아버지 같았던 분들

그분들의 양식을 먹고 자란 나같은 독자가 어디 한 두명일까!

그 분들은 가셨어도 작품은 우리들 가슴에 남고,

언제든 볼 수 있으니 그것으로도 위안일수는 있으리라..

단지 그 분들을 닮고자 하는 수많은 독자들을 통해서

그 정신의 싹이 새로운 순으로 발아될 것이라는 기대를 해 본다.

 

많이 사랑했고, 좋아했으며 닮고 싶었고,

선생님이 가시는 길을 갈수만 있다면...

똑 같이 나도 저 분 처럼...

우르렀던 님!

감히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2011년 1월 22일 신새벽에 하늘로 가신 님을 그리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