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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그의 삶 그의 문학

구름뜰 2011. 1. 24. 08:59

 

[박완서 타계] 인간의 허위와 속물근성 낱낱이 까발린 ‘영원한 현역’

[중앙일보] 입력 2011.01.24 00:38 / 수정 2011.01.24 06:27

그의 삶 그의 문학

 

가톨릭 신자였던 박완서 작가에게 글쓰기와 신앙은 동일한 구도행위였다. 박씨는 삶의 고통을 창작의 에너지로 승화시켰다. 22일 고인의 빈소에서 연도(煉禱·위령기도)를 하고 있는 수녀들. [최정동 기자]

22일 타계한 소설가 박완서씨는 영원한 현역이었다. 1970년 불혹의 나이로 늦깎이 등단한 후 한국의 어떤 작가보다 정력적으로 소설을 써냈다. 지난 40년간 책을 내지 않은 해가 없다시피 했다.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고, 대중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예민하면서도 신랄한 시선, 현미경 같은 촘촘한 묘사로 실감나게 복원해내는 시대와 개인의 비극에 독자들은 울고 웃었다. 한국문학의 빛나는 성좌, 문단의 거목(巨木)으로 불리는 이유다. “한국 문학사의 맥락과 연대표를 갱신하는 업적을 이룬”(문학평론가 이경호) 문단의 큰 어른이었다.

 문학에 대한 애정이 강렬해서였을까. 그는 담낭암이라는 무서운 병마도 이겨내는 듯 했다. 지난해 9월 발병해 10월 초순에 수술을 받은 후 경과가 좋아 경기도 구리시 아치울 마을 자택과 서울 일원동 삼성의료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다. 투병 중에도 문예지 문학동네의 젊은 작가상 심사를 맡아 병상에서 후보작들을 읽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이 공교롭게도 심사일이었다. 심사장소에 나갈 수 없었던 그는 미리 e-메일을 보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문학상 심사에 참여한 것이다. 그런 그도 끝내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진 못했다. 22일 새벽 갑작스런 호흡 곤란에 이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졌다.

 도도한 강물 같은 그의 문학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6·25 전쟁체험이 바탕이 된 것들이다. ‘복수(復讐)로서의 글쓰기’로 표현되는 작품들이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온갖 수모와 만행을 견디어내야 했다. 그때마다 그 상황을 견디어낼 수 있는 힘이 된 것은 언젠가는 이걸 글로 쓰리라는 증언의 욕구 때문이었다. 도저히 인간 같지도 않은 자 앞에서 벌레처럼 기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오냐, 언젠가는 내가 벌레가 아니라, 네가 벌레라는 걸 밝혀줄 테다.”

 생전 그가 한 글에서 밝혔던 소설을 쓰게 된 이유다. 어떻게 해서도 잊혀지지 않는 참혹한 전쟁체험, 이를 언젠가는 까발리겠다는 앙심(怏心)이 소설 쓰는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고인은 1931년 지금은 북한땅인 경기도 개풍군 박적골에서 태어났다.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던 해 한국전쟁이 터진다. 미처 피난 가지 못하고 올케와 함께 북으로 끌려가던 그는 “임진강은 절대로 건너선 안 된다”는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고는 극적으로 탈출했다. 하지만 생쌀을 씹고 폭격을 피하며 돌아온 서울은 처참했다. 오빠가 좌익활동을 한 죄로 전쟁의 주도권이 바뀔 때마다 남북 양측으로부터 번갈아 수모를 겪었다. 오빠는 끝내 사망한다.

 전쟁체험은 그를 문학으로 끌어올린 원동력이었다. 오빠를 잃은 상실감, 아들을 먼저 보낸 참척(慘慽)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어머니를 고스란히 지켜본 경험이 그의 자양분이자 수원지인 것이다. 전형적인 ‘억척어멈’이었던 어머니를 소재로 한 ‘엄마의 말뚝’ 연작, 화가 박수근이 등장하는 등단작 ‘나목’ 등이 대표적이다. 연작 형식의 자전 장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도 한국전쟁의 비중은 상당하다.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음화(陰畵)인 셈이다.

 그는 88년 교통사고로 생때같던 막내 외아들을 잃는다. 서울대 의대를 다니던 잘생긴 아들이었다. 자신의 어머니에 이은 ‘대를 잇는 참척’이었다. 이런 기구한 경험은 단편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일기 형식의 소설집 『한 말씀만 하소서』 등으로 나타난다. 모성(母性) 모티프의 변주다.

 나머지 한 갈래는 보다 대중을 겨냥한 세태소설이다. 신문 연재소설 『휘청거리는 오후』가 대표적이다. 결혼 적령기의 여성이 마담 뚜를 통해 부유하지만 아이 둘 딸린 50대 남성과 결혼하는 얘기다. 돈이 우선인 세태,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통렬히 비판했다. 이럴 때 작가의 시선은 야멸차고 냉정하다. “당돌함과 솔직함으로 세상의 허위와 우리 안의 속물적 욕망을 머뭇거림 없이 정면으로 까발기는”(평론가 황도경)특유의 면모다. 평론가 김수이는 독자들이 그런 박완서 소설을 읽을 때 “피학적이며 가학적인 쾌감에 전율하게 된다”고 평하기도 했다.

 22일 빈소를 찾은 평론가 김화영씨는 “선생의 글쓰기는 마치 호미 같다”고 평했다. “모난 곳 없이 둥굴둥글 하면서도 내리찍을 때는 가차 없다”는 것이다. ‘사납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신랄한 시선을 통해 삶의 진상을 온전히 드러내려는 글쓰기. 흉하고 쓰디쓴 인간의 본성, 삶의 알맹이를 드러내는 글쓰기 방법론이다.

 그가 80년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섰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한국작가회의)를 재정적으로 후원했다는 사실은 꽤 알려진 얘기다. 이시영 시인은 “작가회의가 어려울 때마다 박완서 선생이 수백 만원씩 도와주는 바람에 버틸 수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이씨는 또 “85년 출판사 창비가 정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자 되살려 내라며 지식인 2853명이 서명한 문서를 박완서 선생이 소설가 황순원·이호철씨 등과 함께 당시 문화공보부에 갖다 냈다”고 했다.

 박씨는 한국전쟁에 의해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거덜나 이념 싸움이라면 누구보다도 넌더리를 냈다. 그런 만큼 균형감각을 가지고 현실과 사회를 고민했다. 평론가 김화영씨는 “고인은 좌도 아닌 우도 아닌 중간에 섰던 분이셨다. 우리 문단에 이런 분이 다시 없다”고 애도했다.

 고인은 황순원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만해문학상, 인촌상, 호암예술상, 보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93년부터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했고 2004년 예술원 회원이 됐다. 2006년 문화계 인사로는 처음으로 서울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장례식은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치러진다. 빈소는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발인은 25일 오전 8시 40분. 장지는 용인 천주교 묘지다. 유족으로 장녀 호원숙(작가), 차녀 원순, 삼녀 원경(서울대 의대 교수), 사녀 원균 씨 등 4녀와 사위 황창윤(신라대 교수), 김광하(도이상사 대표), 권오정(성균관대 의대 학장), 김장섭(대구대 교수)씨 등이 있다. 02-3410-6916.

글=신준봉 기자
사진=최정동 기자

 

 

 

이해인 수녀가 말하는 ‘박완서’

[중앙일보] 입력 2011.01.23 19:38 / 수정 2011.01.24 06:26

이해

 

이해인 수녀가 23일 서울 일원동 삼성의료원에 마련된 박완서 작가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김도훈 인턴기자]


지난해 봄이었다. 22일 타계한 박완서씨가 이해인(66) 수녀에게 전화를 했다. “난 다른 이유 없이 오직 수녀님을 보러 갈 거야.” 그 길로 고인은 기차를 탔다. 지난해 봄에도, 가을에도 고인은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2008년부터 암 투병 중인 이해인 수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박완서 1931~2011
 

 

이해인 수녀는 “그때는 선생님(2010년 9월 담낭암 진단)이 편찮으시기 전이었어요. 마치 저의 위로자가 되기로 결심을 하신 듯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고인은 “암에는 흰 살 생선이 좋다”며 이 수녀의 손목을 잡고 일식집에 가서 도미머리 정식을 주문했다. 또 부산 광안리 성베네딕도 수녀원의 모든 사람을 위해 ‘자장면 100그릇’을 사기도 했다. 두 사람은 수녀원 근처의 바닷가도 거닐고, 경남 밀양의 가르멜 수녀원에 있는 이해인 수녀의 언니 수녀를 방문하기도 했다. 서울로 떠날 때 고인은 이해인 수녀에게 카드를 한 장 건넸다. 거기에 자필로 이렇게 적었다.

 ‘고향에 다녀가는 것처럼 마음의 평화를 얻어 갑니다. 내년 이맘때도 이곳 식구들과 자장면을 같이 먹을 수 있기를, 눈에 밟히던 꽃과 나무들이 다 그 자리에 있어 눈 맞출 수 있기를 기도하며 살겠습니다. (…) 당신은 고향의 당산나무입니다. 내 생전에 당산나무가 시드는 꼴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꼭 당신의 배웅을 받으며 이 세상을 떠나고 싶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나보다는 오래 살아주십시오. 주여, 제 욕심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2010. 4. 16. 박완서’

 카드의 글귀처럼 고인은 먼저 갔다. 올봄에 다시 눈 맞추길 바랐던 꽃과 나무, 또 한번의 자장면 식사는 뒤에 남겨둔 채 말이다.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난 외아들의 생일이 봄날에 끼어 있다며 약속했던 ‘봄날의 부산행’을 뒤로한 채 말이다.

 이제 그 자리에는 ‘당산나무’만 덩그러니 남았다. 22일 고인의 당산나무였던 이해인 수녀에게 추모 인터뷰를 청했다. 이날 전화 통화를 할 때 이해인 수녀는 빈소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23일에는 고인의 입관식을 보고 있었다.

 

박완서씨와 이해인 수녀가 지난해 봄 경기도 의왕시 성 라자로 마을 수녀원 돌계단에 정겹게 앉아 있다. 두 사람은 작가로서, 신앙인으로서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박완서 선생님과 가까운 사이셨죠.

 “연배는 저보다 14년 위세요. 그래도 마음의 갈등이 있을 적에는 ‘고해성사’를 보시기도 했어요. 저 역시 그렇게 했습니다. 선생님은 1988년에 남편과 외아들을 잃으셨습니다. 정말 비통한 슬픔에 잠겨 계셨어요. 그때 저와 친분을 쌓게 돼 더 가깝게 지냈습니다. ‘세상에 사는 우리들은 가끔 수도원에 가서 쉬면 좋고, 제복(수녀복)을 입은 사람들은 가끔 종교적인 분위기를 떠나 사가(私家)에 가서 지내야만 쉼이 된다’고 하시면서, 그런 집이 필요할 적엔 당신 집에 오라고 초대하시기도 했어요.”

 -마지막 만남은 언제였나요.

 “지난해 11월 초였습니다. 선생님 댁에 가서 저녁도 먹고, 기도도 해 드렸어요.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나도 이리 힘든데 수녀님은 더 힘들지 않으냐?’고 걱정을 하셨어요. 따님이 차려준 저녁을 맛있게 먹는 제 모습을 아주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기억이 납니다. 가끔 만나면 이별의 아픔, 언젠가는 가야 할 길에 대해서도 조심스레 의견을 나누곤 했습니다. 잘 죽는 것이 과제라고, 어떻게 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안 끼치고 죽을 수 있을까 도움을 청하며 기도해야겠다고.”

 - 가장 좋아하는 고인의 작품은요.

 “저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를 좋아해요. 제목에 약자를 배려하는 겸손한 따뜻함이 배어 있어서요. 선생님의 작품세계는 숲입니다. 인간의 다양함을 두루 경험할 수 있는 큰 숲 같은 거요. 시든, 수필이든 선생님의 작품은 굳이 교훈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고도, 많은 것을 간접적으로 배우게 되는 매력이 있습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소재를 갖고도 반짝이는 재미를 더해주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습니다.”

 -빈소에서 고인의 사진을 봤을 때는 어떠셨어요.

 “사진 속의 웃으시는 모습이 어찌나 정겹던지, 막 울다가도 그 모습에 조금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따님들이 저를 붙들고 막 울고 있는데, 시종일관 의연하게 처신하긴 좀 힘들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 혼났습니다.”

 -‘작가 박완서의 죽음’은 수녀님에게 어떤 것입니까.

 “정신적으로 크게 의지했던 멘토 한 분을 잃은 상실감입니다. 이 상실감은 오래갈 것 같습니다. 저를 아껴주시던 시인 김광균·박두진·구상, 수필가 피천득, 김수환 추기경님, 법정 스님을 떠나보냈을 적에도 그랬듯이 말이에요.”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주세요.

 “선생님. 선생님이 떠나신 날 눈이 펑펑 내렸어요. 지난해 봄 우리가 같이 사진을 찍기도 했던 성라자로마을 수녀원 돌층계 위에 눈사람으로 서서 선생님을 배웅했습니다. 선생님 목소리처럼 눈은 조용조용 내리는데, 선생님도 흰 눈처럼 곱게 가볍게 가신 거지요? 아름다운 그 나라에서 언젠가 다시 만나요. 편히 쉬세요. 사랑하는 선생님. 안녕, 안녕히!”

글=백성호 기자
사진=김도훈 인턴기자
 
◆이해인 수녀=1945년 강원도 양구 출생. 가톨릭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64년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 입회, 현재는 부산 광안리의 성베네딕도 수녀원에 있다. 76년에 발간한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비롯해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등 많은 베스트셀러 시집과 기도시집 등이 있다. 2008년부터 암 투병 중이다.

 

 

[박완서 타계] 서점가에도 인터넷서도 ‘벌써 그리운 선생님 … ’

[중앙일보] 입력 2011.01.24 00:39 / 수정 2011.01.24 06:26 
“박완서 작가의 작품은 가족들이 함께 볼 수 있는 유일한 책이었다.”

 23일 서울 강남구의 한 대형서점을 찾은 허은심(45·여)씨와 딸 방수진(14)양이 박완서 특별전 코너에 섰다. 모녀는 고인의 별세 소식을 듣고 바로 서점으로 나왔다. 허씨는 고인의 데뷔작인 『나목』부터 주요 작품을 탐독했던 팬이었고, 딸도 교과서에서『자전거도둑』 발췌 글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었다.

허씨는 “고인의 작품엔 6·25전쟁 등 한국의 역사가 잘 녹아 있어서 아이와 함께 읽고 이야기해보고 싶다”며 “아이들이 책을 본 후에 고인이 그랬던 것처럼 소소한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전국 대형서점에 마련된 특별전 코너는 고인을 기억하는 독자들로 북적댔다. 10대 청소년부터 50~60대 중장년층까지 세대와 성별의 구분이 없었다.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의 경우 평소 4~5부 팔리던 책이 22일 하루에만 50부가 팔렸다.

소설 담당 전설라(25)씨는 “아동도서부터 소설, 수필집까지 전 세대를 아우르며 인기”라고 밝혔다. 주부 홍양숙(50)씨는 “고인의 책을 보면 마치 부모님한테 어린 시절 얘기를 듣는 것 같다. 친정엄마 돌아가신 것처럼 그 시절 이야기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것 같아 섭섭하다”고 말했다. 중학생 유나현(15)양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인상 깊게 읽었는데 주변의 따돌림을 이겨낸 주인공처럼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의지를 갖고 싶다”고 했다.
 
 사이버 공간에서 추모행렬이 이어졌다. 박씨가 주요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박완서 신드롬’에 비유할 만하다. 아이디 ‘antoin***’씨는 “배려와 사랑이 메말라가는 시대에 어른 한 명을 잃었다. 그는 글이라는 매체를 통해 슬픔과 고난을 이겨낼 용기와 힘을 북돋아 준 어른이었다”고 올렸다. 또 고인이 활동했던 NGO단체 유니세프도 홈페이지에 추도사를 띄워 “소말리아 난민촌, 몽골의 오지 등에서 어린이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오드리 헵번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했다.

 전문가들도 각계각층에 부는 박완서 추모열기를 주목했다. 이시영 시인은 “우리 사회가 휴머니즘에 목말라 있을 때 박완서의 소설은 시대와 이념을 뛰어넘어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 했다”고 설명했다.

서울대 조국 (법학과) 교수도 “전쟁의 상처, 여성의 억압이란 주제를 대중적으로 다뤘다. 전쟁 등 삶의 고통을 몸으로 아는 분이기 때문에 대중들이 공감하고 사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효은·이한길 기자

 

[박완서 타계] “가난한 문인에게 돈 받지 마라” 유지 따라 부의금 사양 푯말

[중앙일보] 입력 2011.01.24 00:40 / 수정 2011.01.24 06:26

이틀째 1500여 명 찾은 빈소 표정 삼성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의 부인 홍라희 여사(가운데)와 호텔신라 이부진 사장(왼쪽)이 23일 문상하고 있다.


23일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6호실. 전날 타계한 소설가 박완서씨를 추모하는 각계 조문 행렬이 이틀째 이어졌다. 빈소에선 “주님 정혜엘리사벳(박완서 선생의 천주교 세례명)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수녀들의 연도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가난한 문인에게 부의금을 받지 말라”는 박씨의 유언에 따라 빈소 입구에는 ‘부의금은 사양한다’는 푯말이 세워졌다. 유명 인사들은 물론, 박씨의 문학에 위안받았던 일반 독자도 조문 행렬에 동참했다. 유족 측은 “이틀간 1500 여명이 조문을 마쳤다”고 전했다.

 문단의 큰 어른을 잃은 문학계 인사들의 상심이 컸다. 문학평론가 김병익, 시인 황동규씨 등이 빈소를 찾았다. 김병익씨는 “박완서 문학의 처음과 끝을 모두 볼 수 있었다는 게 영광스럽다”고 했다. 정치계에선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과 전재희 한나라당 의원이 빈소를 찾았다. 정 최고위원은 “우리 현대사를 그대로 온몸으로 품었던 큰 어른이 떠나니 이 겨울이 더 추울 것 같다”고 말했다.

 최불암·안성기씨 등 연예계 인사들도 침통한 표정이었다. 박씨와 유니세프 봉사활동을 함께했던 안성기씨는 “상처과 고뇌를 안고 살아오셨던 것을 글로 잘 표현해내신 분이었다. 박완서 선생님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새삼 소중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박씨의 타계 소식이 전해진 22일에는 박씨와 인연이 깊었던 문학계 인사들이 대거 조문을 마쳤다. 김지하 시인, 소설가 박범신, 이승우, 은희경, 김연수, 양귀자, 최일남, 김승옥 씨, 문학평론가 김윤식씨, 양숙진 현대문학 주간 등이 한걸음에 빈소로 달려왔다.

 정진석 추기경을 비롯해 이명박 대통령, 손학규 민주당 대표, 김형오 전 국회의장, 한승수 전 국무총리, 이희호 여사, 정몽준 의원,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등이 조화를 보내 고인을 추모했다. 문화계에서는 구중서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박맹호 민음사 회장, 김주연 한국문학번역원장, 학계에서 오연천 서울대 총장, 재계에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조화를 보냈다.

 

오늘자(1월 24일 월요일) 중앙일보는 박완서 선생님에 관한 기사로 도배를 한 듯 합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서도 메세지 하나씩 던져주고 가시는 님들

법정스님은 더 이상 말빚을 지고 싶지 않다며 절판을 요구하셨고,

선생님은 당신의 빈소를 찾을 문인들을 걱정했습니다.

이해인 시인의 말씀처럼 큰 상실감으로 헛헛한 기분입니다.

님들은 가셨어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님의 향기는  작품속에 남아있으니

떠났어도 다시 뵐 수 없어도 그 훈향은 언제나 맡을수 있으니..  

그것으로도 감사할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