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구름뜰 2011. 3. 25. 08:22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 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 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 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었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져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이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고영민

 

시를 쓰는 일은 마음속에 상상력 발전소를 가동시키는 일이라고 한다.

그림으로 동영상!으로 보는 듯한 상황이 잘 묘사된 시다.

 

시집 낱장을 찢으며

그분 시인에게도 미안하고 시에도 미안해서

나머지를 누는 동안 제의식처럼 '정성껏'한번 더 정독하는 시인,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에선 환골탈태 과정을 거치고 탄생한 시가.

시인과, 책과, 자신이 시라는 것과, 자신이 속해 있던 페이지도 온전히 버리고

다시 새로운 쓰임을 위해 승화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 해졌다.'

아프지 않을 만큼, 부들부들한 결은 완벽한 승화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닦지 않고 읽는 것으로 표현한 것, 

똥구멍(항문)의 정화는 시가 주는 정서적 정화를 의미하는게 아닐까. 

 

고영민 시인이 이 시를 쓰게 된 동기를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산에 오르다 베낭속에 휴지가 없고 시집만 있던 상황에서

느낀 순간포착이 이런 멋진 시를 만들어 내지 않았을까 싶다.

실상은 아마도 지인들이나 주변사람들에게 빌려서 볼일은 휴지로 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니까 도입부 휴지가 없다까지는 사실이고,

그외의 상황은 시인의 상상력이 아닐까 싶다.

진실이야 시인만이 알고 있을 테고..ㅎㅎ

그냥 휴지로 볼일을 봤다면 무슨 재미,, 시의 미(美)학은 여기에 있다.

어쨌거나 시인의 몰입은 똥구멍으로도 시를 읽고,

똥누는 일로도 시를 생산했으니...

배설의 개운함까지 ..

 

뒷문단은 제 상상력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