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향기

어머니의 '이야기 보따리'

구름뜰 2011. 8. 17. 09:25

 

 


내가 어렸을 적에,
어머니는 참으로 뛰어난 이야기꾼이셨다.
무작정 상경한 세 식구가 차린 최초의 서울 살림은
필시 곤궁하고 을씨년스러운 것이었을 텐데도
지극히 행복하고 충만한 시절로 회상된다.
어머니는 밤늦도록 바느질품을 파시고
나는 그 옆 반닫이 위에 오도카니 올라앉아
이야기를 졸랐었다. 어머니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 박완서의《모든 것에 따뜻함이 숨어 있다》중에서 -


* 할머니의 이야기가 어머니에게 전해지고
어머니의 이야기가 다시 아들딸에게 이어집니다.
어머니의 이야기 속에는 무궁무진한 상상력과 지혜가
가득합니다. 자녀들의 영혼 깊은 곳에 스며들어
좋은 시인이 되게 하고 독보적인 소설가로도
만듭니다.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 삶도
풍요롭습니다. '이야기 보따리'도
값진 유산이 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TV도 없고,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던 시절,

고향집 뒷집이 큰집이라 겨울밤이면 할머니방에서 

옛날 이야기를 듣었던 날들이 많았다.

화롯불이 방 한가운데 있고, 긴 담뱃대에 탈탈털어서 담뱃재를 거둬내고

다시 누런 답뱃잎을 꾹국 눌러담으시던 모습,

모락모락 연기 피웠던 그 담배연기는 왜 매운 기억이 없을까.ㅎㅎ

 

기억나는 이야기는 없지만, 호랑이, 여우, 늑대 이야기를 들으며

이야기속 나라로 여행을 떠났던 기억은 뚜렷이 있다.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방문을 열면

그제사 현실로 확 돌아와버린 그런 느낌을 언제나 느꼈었다. ㅎㅎ

극장에서 영화보고 나오는 느낌에 비할 수 있겠다.

 

 

이야기! 옛날이야기.

그렇게 이야기는 할머니만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이었다.

언제라도 풀어놓으실 보따리가 있었던 할머니는

존경 이상을 넘어 감히 넘볼 수 없는 신성이었다. 

 

이야기는

고대 신화의 영웅담에서, 세월을 따라 

전설, 민담으로 내려오면서 조금씩 각색되었을 것이다.

주변국이 아닌 먼 나라에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있다고 하니.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이야기만큼 발없이 천리 만리 간 것이 또 있을까.

 

대체로 신화에선 신분이 미천하거나 태어날때 부터 알에서 태어나는등

기이한 상황이 연출되고, 또 반대로 아주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났더라도

반드시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영웅이 된다는 것이 주 내용이다.

주몽 이야기 등이 그 원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전설의 시대가 되면 개인의 그 어떤 노력도

사회적인 틀안에서 극복하기 어려운 비극성의 요소를 많이 가지게 된다.

그래서 전설의 고향이 대부분이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항력적인 비극이 많다.

 

이후 민담의 시대에는 평범함 사람들이 왕과 왕비가 되기도 하는

'서동요'라든가, '온달과 평강공주' 같은 이야기로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각색 허구가미 등 시대에따라서 변화양상도 조금씩 보였다.

대체로 어려움을 겪지만 이겨내고 성공한다는 것,

신화, 전설, 민담  그래도 '권성징악'만은 뚜렷하게 각인시킨,

어린 손자 손녀들의 정서교육에는 일조 한 그 부분을

이야기가 맡았고 할머니가 풀어준 셈이다.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하면 또 풀어주던 보따리, 그 풍성했던 큰 보자기.. 

그 충만함이 우리들 정서를 충만케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나는 내 아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 주었나?

내 안에 이야기 보따리하나 준비해 두지 못한 빈약한 세대가 되어 있다.

드라마가 대신해 주는 세월을 살고 있어서 일까.. 

문명의 이기로 우리에게서 누락되어 가는 것들은 알게 모르게 또  얼마나 많을까. 

 

나도 우리 할머니처럼

손자 손녀들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ㅋㅋ

"할머니 이야기 해줘" 하면

"책 읽어 줄게"라며 동문서답 할 것 같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