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 노래하는 목소리가 있다면 안드레아 보첼리처럼 들릴 것이다.”(셀린 디옹) “보첼리의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쏟아지고 만다.”(오프라 윈프리)
감미로운 목소리의 스타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53·사진)가 15일 밤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1981년 9월 ‘사이먼과 가펑클’이 해체 11년 만에 재결합 콘서트를 열었고, 1993년 6월 절정기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공연했던 곳이다. 거센 비바람에 가랑비가 내리는 센트럴파크의 그레이트론은 그야말로 ‘폭풍의 공원’이었다. 보첼리의 열혈 팬들은 우산과 두꺼운 코트로 무장하고 줄을 섰다. 주최 측은 몇 주 전 뉴욕시 각 공원에서 무료 티켓 6만 장을 미리 배포했다. 플로리다에서도, 워싱턴 DC에서도, 펜실베이니아주에서도 팬들이 몰려왔다.
정리=뉴욕중앙일보 박숙희 문화전문기자
“녹음실에선 100% 만족할 때까지 노래한다”
VIP 텐트 속에선 보첼리의 가족, 가수 스팅, 배우 앨릭 볼드윈 등의 모습이 보였고, TV 앵커 케이티 쿠릭과 18세 연하의 남자친구 브룩스 펄린,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와 수퍼모델 출신 부인 멜라니, 그리고 전 부인 이바나 트럼프도 이 특별한 콘서트를 지켜보았다.
매년 여름 그레이트론에선 뉴욕필하모닉 무료 콘서트가 열려 왔다. 올해는 뉴욕필 콘서트가 취소되면서 앨런 길버트가 지휘하는 뉴욕필이 대신 보첼리와 만난 것이다.보첼리는 ‘여자의 마음(La donna e mobile·리골레토)’ ‘가라, 토스카!(Va, Tosca!·토스카)’ ‘오 아름다운 아가씨(O soave fanciulla·라보엠)’ 등 오페라 아리아에서 ‘볼라레’ ‘푸니쿨라’ 등 이탈리아 노래, 그리고 팝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레퍼토리를 선사했다. 깜짝 게스트 셀린 디옹과는 히트곡 ‘기도’를, 베테랑 가수 토니 베넷과는 ‘뉴욕, 뉴욕’을 노래해 청중의 갈채를 받았다.
피날레 곡은 세라 브라이트먼과 불렀던 메가 히트곡 ‘Time to Say Goodbye(Con te Partiro)’와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투란도트)’로 장식했다. 보첼리는 센트럴파크 콘서트를 앞둔 13일 링컨센터 내 월터리드시어터에서 공개 인터뷰를 했다. 이 자리엔 임신한 약혼녀 베로니카 베르티, 둘째 아들 마테오, 어머니 에디 보첼리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콘서트 위해 30파운드(13.6㎏) 감량
●아버지의 꿈이 당신이 미국에서, 특히 뉴욕에서 공연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실현하게 된 소감은.
“센트럴파크처럼 큰 무대에서 공연하게 될 줄 몰랐다. 특히 셀린 디옹, 토니 버넷, 브린 터플, 데이비드 포스터 등 재능 있는 아티스트들과 공연하게 돼 기쁘다. 아버지가 살아계셔서 이 콘서트를 보셨다면 정말 좋아하셨을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온 것은 나 혼자 이룬 것이 아니다. 신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늘 뉴욕필과 에버리피셔홀에서 세 시간 리허설을 했다. 야외 무대의 리허설은 다를 텐데, 어떻게 준비하나.
“준비는 어디서도 항상 같다. 항상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번 콘서트를 CD와 DVD로 남겨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할 수 있게 돼 기쁘다. 콘서트에서 신곡 5곡을 부를 것이다. 콘서트를 준비하면서 사실 희생도 했다. 이탈리아에서 8월은 바캉스가 아닌가. 그런데 콘서트를 앞두고 한 달간 파스타도 와인도 포기해야 했다(웃음). 난 이탈리아 사람인데 LA에 와 있던 아들이 날 보더니 ‘아빠, 날씬해 보이는걸!’ 하더라.”
●파스타가 목소리에 나쁜가.
“파스타가 문제가 아니라 지방이 해로운 것이다.”(보첼리는 이 다이어트로 30파운드를 뺐다고 했다.)
●오페라가 첫사랑이라고 했다. 지금 오페라는 당신에게 무엇인가.
“어렸을 때부터 학교, 교회, 가정에서 누군가는 노래를 해야 했다. 사람들이 노래를 종종 시켰다. 어떤 때는 친구들과 공놀이를 한 후 피곤한데도 노래를 하라고 했다. 오페라의 큰 볼륨, 아름다운 억양, 깊은 표현력을 좋아한다.”
●젊어서 비틀스와 스티비 원더의 노래를 즐겼다던데.
“난 20대에 늦게 팝송을 발견했다. 대학 시절 피아노 바에서 노래하면서는 오페라를 부를 수 없었다. 그래서 팝을 듣게 됐고, 재미있었다. 팝을 알게 된 것은 새 언어를 배우는 기분이었다. 그때 내가 오페라를 노래하면 친구들은 ‘왜 그렇게 소리를 마구 지르냐? 그만해!’라고 놀리곤 했다.”
●콘서트보다 레코딩을 더 좋아하나. 청중 앞에 서는 것에 공포증이 있다던데.
“난 항상 최선을 다하지만 콘서트 후 들어 보면 100%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안 듣기 시작했다. 스튜디오 레코딩은 마음에 들 때까지 반복 녹음할 수 있기 때문에 선호한다.”
●미국 TV 미니시리즈 ‘소프라노’에, 파스타 광고 ‘바릴라’에도 노래가 쓰였다. 대중문화 속에 등장하는 자신에 대한 생각은.
“내 레코드와 목소리가 너무 여러 곳에서 나오니까 나부터 점점 지겨워졌다. 사람들이 ‘이젠 그만해, 그만해!’ 하는 것 같다.”
오페라는 ‘음악의 파라다이스’
●어려서 울다가도 클래식 음악만 들으면 그쳤다던데.
“6개월 때였을 것이다. 운명이었나 보다.”
●음악적인 가족이었나.
“우리 아버지는 음치셨다. 내게 화가 나셨을 땐 목소리가 무척 크셨지만, 음치셨다. 어머니 쪽은 프로는 아니지만 뮤지션들이 있다. 아마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다. 여덟 살 때 피아노를 시작했는데, 난 게을렀고 그리 잘하지는 못했다. 스무 살 땐 제법 모든 곡을 칠 수 있었다. 노래는 늦게 시작하게 됐다. 난 노래는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공부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못 했다. 음악 코치를 만난 후에야 알게 됐다. 첫 선생님이 ‘넌 아름다운 목소리를 갖고 있는데, 정반대 기법으로 노래한다’고 말했다.”
●피사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1년간 변호사로도 일했다. 어떻게 가수가 됐나.
“노래가 아니고선 아무도 변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도 변호하지 않는 것이 낫다. 나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인생은 이상한 모험의 연속이며, 아무도 미래를 모른다. 난 미래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았으며,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부모님이 노래하겠다는 것을 찬성하던가.
“부모님은 ‘너는 자유니까 하고 싶은 것을 해라’고 하셨다. 하지만 ‘공부부터 해라. 노래는 어려운 도전이니까. 그리고 지금 당장은 우리를 위해서나 노래하라’고 하셨다.”
●전설적 테너 프랑코 코렐리의 문하생이었다.
“우리 집 가정부가 ‘프랑코 코렐리, 라 스칼라, 모든 이를 놀라게 하다’는 신문을 보여주면서 나에게 ‘무척 미남이니 만나 보라’고 했다. 그래서 만나게 됐는데, 보자마자 반했다. 그에게 개인적으로 배우면서 그를 모방했다. 그의 목소리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하루 종일 배우고, 저녁식사에도 초대해 한밤중까지 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데 참 슬픈 일은 내가 유명해지면서 함께 다니면 사람들이 나를 ‘마에스트로’라 부르며 사인을 요청했다. 나의 마에스트로는 사실 프랑코인데, 나는 정말 당황했고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그 후로 그에게 더 이상 배울 수 없었다.”
●당신은 ‘크로스오버 가수’라는 호칭을 싫어한다던데, 이유라면.
“난 크로스오버 콘서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언어는 고유하게 존중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팝송과 오페라의 언어는 다르다.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함께 쓰면, 모두 있지만 결국 아무것도 아닌 셈이 된다. 각 언어의 순수성을 유지해야 한다. 크로스오버를 존중하지만 나는 아니다.”
●오페라가 쇠퇴하는 예술인가.
“그렇지 않다. 사실 극장은 항상 청중으로 가득 차 있다. 이탈리아에선 정기 티켓을 구하려면 누군가 죽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까지 있다. 오페라 극장의 좌석은 스포츠경기나 록 콘서트가 열리는 스타디움보다 적은 2000여 명 내외다. 오페라는 TV에 잘 맞지 않는 예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층은 오페라를 좋아한다. 오페라는 ‘음악의 파라다이스’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라
22일 보첼리는 53세가 됐다. 약혼녀 베로니카 베르티와 사이에 아기도 곧 태어날 예정이다. 그리고 2000년 아버지에게 바쳤던 자서전 『침묵의 음악(The Music of Silence)』 개정판이 이달 말 출간된다.
●회고록 『침묵의 음악』이 11년 만에 개정판으로 나온다. 무엇이 추가됐나.
“당시 책을 급하게 써서 낸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읽으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훗날 수정할 부분도 있었고, 주인공 아모스의 지난 10년간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었다. 자전적 이야기지만 허구다.”
●왜 안드레아가 아니고 아모스를 주인공으로 했나.
“우선 이름이 아름답지 않은가. 그리고 아모스는 오랫동안 나와 아주 가까웠던, 내게 큰 영향을 준 훌륭한 이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에 대한 헌사다.”
(아모스는 안드레아의 열여섯 살짜리 큰아들 이름이기도 하다.)
●플루트와 색소폰도 연주한다. 베르티에 따르면 아들을 위해 작곡도 했다던데, 앞으로 갈 길인가.
“작곡은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라 좋아한다. 여러 곡을 작곡해 녹음도 했지만 작곡은 내 강점이 아니다. 내게 작곡가로 성공하는 것은 머나먼 길이다.”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추천해 이탈리아 록 스타 주커로와 공연하면서 유명해졌다. 교황 앞에서, 빌 클린턴 앞에서도 노래했다. 명성이란 무엇일까(보첼리는 파바로티의 결혼식과 장례식에서 노래했다).
“명성이란 참 이상한 것이다. 우연하게 시작된다. 처음에 명성을 얻으면 호기심도 생기고 흥미 있다. 이후엔 습관이 되며, 무언가를 주지만 한편으론 사생활을 빼앗아 간다. 한 무명의 시골 청년이 ‘안드레아’가 돼 곳곳에서 사인과 악수를 요청 받게 됐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들로부터 일관되게 애정을 느끼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7000만 장 앨범 판매, 빌보드 톱10에 앨범 5개 랭크, 그래미상과 골든글로브상 수상 등 많은 것을 성취했다. 무엇이 남았나.
“내가 꿈꾼 것 이상으로 이루어졌다. 또 더 이상 이기고 싶은 것이 없어서 좋기는 하다. 가수라는 행운의 직업인으로서 정말 중요한 것은 좋은 기억을 남기는 것이다. 우리 애들에게도 말한다. 항상 최선을 다하라. 말로만 해서는 안 되므로 행동으로 보여주려고 한다.
안드레아 보첼리
1958년 토스카니 라 스테르차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녹내장이 있었으나 열두 살 때 축구를 하다 다쳐 시력을 잃었다. 여섯 살 때 피아노를 시작해 플루트, 색소폰, 트럼펫, 트럼본, 하프, 기타에서 드럼까지 두루 악기를 배웠다. 피사대에서 법률을 전공한 후 변호사로 일하면서 피아노 바에서 노래했다. 1994년 산레모 가요제에서 신인상을 수상한 뒤 유럽에서 주목 받았다. 이어 ‘Time to Say Goodbye(Con te Partiro)’가 1200만 장 팔리며 세계적 스타덤에 올랐다.
1998년 셀린 디옹과 듀엣으로 부른 애니메이션 ‘카멜롯을 찾아서’의 주제가 ‘기도(The Prayer)’로 골든글로브 최우수 오리지널송 상을 받았다. 같은 해 피플지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50인’에 선정됐으며, 이듬해엔 1961년 이후 클래식 연주자 최초로 그래미상 최우수 신인상 후보에 올랐다.
클래식 앨범 ‘Sacred Arias’는 500만 장 이상 팔리며 솔로 아티스트로서는 최다 판매 클래식 앨범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2000년 4월 30일 부친이 사망하자 그해 7월 5일 뉴욕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아메리칸 드림: 자유의 여신상 콘서트’를 열었다. 이 공연에서 보첼리는 앙코르곡 ‘꿈(Sogno)’을 아버지에게 바쳤다.
안드레아 보첼리 천상의 노래 … 베스트3
1. 기도(The Prayer)
팝 발라드의 디바 셀린 디옹과 함께 부른 듀엣 곡으로 골든 글로브상을 받았다. 워너브러더스사가 1998년 만든 애니메이션 ‘카멜롯을 찾아서’의 주제가로도 유명하다. 두 가수의 감성적 음색이 부드러운 현악기 연주와 완벽하게 어울려 숭고한 느낌마저 든다. 각기 다른 언어로 노래하다 웅장한 오케스트라와 함께 합창하며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1999년 발매된 ‘소뇨(Sogno·꿈)’ 앨범에 수록됐다.
2. 타임 투 세이 굿바이(Time to Say Goodbye)
독일의 국민적 복싱 챔피언 헨리 마스케의 은퇴 경기를 기념하기 위해 영국의 세계적 팝페라 가수 세라 브라이트먼과 부른 듀엣 곡. 독일에서 14주 동안 1위 차트에 올랐고 300만 장 이상 팔렸다. 세계적으로 1000만 장 넘는 판매고를 기록해 보첼리를 가장 매력적 테너의 반열에 올린 기념비적 곡. ‘당신과 함께 떠나리’란 뜻의 이탈리아어 제목 콘테파르티로(Con te Partiro)로 1995년 이탈리아 산레모 가요제에서 처음 선보였다.
3.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등 ‘스리 테너’가 불러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곡. 보첼리는 1993년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로커 주케로의 유럽투어에 동행해 솔로로 이 곡을 불러 엄청난 환호를 받았다. 주케로는 1992년 듀엣 곡을 부를 테너를 모집했는데 이미 친구인 파바로티를 내정해둔 상태였다. 하지만 보첼리에게 데모 테이프를 녹음하도록 했고 나중에 테이프를 들은 파바로티는 그 목소리에 크게 감동했다. 결국 보첼리는 파바로티의 라이브 공연 대타로 등장해 유럽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축구로 시력 잃은 보첼리
챔스리그 주제가 애창 … 축구사랑 여전
안드레아 보첼리보첼리는 네 살부터 당뇨를 앓아 시력이 매우 약했다. 열두 살 때 축구공에 머리를 맞은 충격으로 시력을 상실했지만 그 이전부터 시력 감퇴를 서서히 받아들였기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는 데 대한 공황장애는 없었다. 실제로 보첼리는 윤곽은 볼 수 있을 만큼의 시력을 갖고 있다. 지난해 내한공연차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빠른 걸음으로 장애물을 이리저리 피하며 차량에 탑승해 경호원을 당황시켰다.
실제 오페라 무대에 오른 보첼리의 모습은, 사연을 모르는 관객이라면 그가 시각장애인인지 쉽게 알아채기 어렵다. 무대 중앙으로 걸어갈 때면 얇은 실을 이용해 위치를 찾아가기도 하고 연출가에 따라 보첼리를 측면에서 부축하는 캐릭터를 만들어 마음껏 다니게 한다. 동작의 제약이 없는 음반에선 다른 테너들과 완전히 동등한 환경에 있는 것이다.
자신을 실명에 이르게 한 축구에 대한 감정은 온순하다. 지금은 축구장에 갈 기회가 별로 없다고 했지만 ‘스리 테너’처럼 보첼리 역시 광적으로 축구를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눈으로 즐길 순 없지만 유럽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티켓을 구해 경기장의 기운을 느끼거나 주제가를 부르면서 축구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좋아하는 이탈리아 클럽팀을 밝힌 적은 없다.
보첼리는 1990년대 ‘포스트 스리 테너’로 꼽히는 소감에 관한 질문을 싫어했다. 그런 지적을 받을 때면 왜 자신과 호세 쿠라, 로베르토 알라냐를 같은 선상에 놓았는지 기자에게 반문했다. “차세대에는 세 명의 테너가 아닌 30명의 테너가 나와야 한다”던 그도 지난해 내한을 앞두고 이런 유의 질문이 점점 줄어들자 아쉬움을 표했다. 보첼리는 클래식계에서 자신이 여전히 비주류의 음성임을 잘 알고 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자격지심이지만 고등 과정을 거친 걸출한 후배 이탈리아 테너가 나오지 않는 것에 묘한 감정을 갖고 있다. 지난해 보첼리 콘서트를 지휘한 유진 콘은 카랑카랑한 음색과 칸초네에 어울리는 프레이징에 있어서 보첼리를 제압할 테너가 보이지 않는다며 ‘성악 교육의 아이러니’라고 했다.
또한 팝페라 가수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자신을 우상으로 여기는 일 디보, 텐 테너스류의 ‘보첼리 워너비’에 대한 코멘트는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팝페라 신인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자신은 “경음악 콘서트를 한번도 한 적이 없는 클래식 스타”라면서 이제는 팝페라와 선 긋기를 하고 있다.
감미로운 목소리의 스타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53·사진)가 15일 밤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1981년 9월 ‘사이먼과 가펑클’이 해체 11년 만에 재결합 콘서트를 열었고, 1993년 6월 절정기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공연했던 곳이다. 거센 비바람에 가랑비가 내리는 센트럴파크의 그레이트론은 그야말로 ‘폭풍의 공원’이었다. 보첼리의 열혈 팬들은 우산과 두꺼운 코트로 무장하고 줄을 섰다. 주최 측은 몇 주 전 뉴욕시 각 공원에서 무료 티켓 6만 장을 미리 배포했다. 플로리다에서도, 워싱턴 DC에서도, 펜실베이니아주에서도 팬들이 몰려왔다.
정리=뉴욕중앙일보 박숙희 문화전문기자
“녹음실에선 100% 만족할 때까지 노래한다”
VIP 텐트 속에선 보첼리의 가족, 가수 스팅, 배우 앨릭 볼드윈 등의 모습이 보였고, TV 앵커 케이티 쿠릭과 18세 연하의 남자친구 브룩스 펄린,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와 수퍼모델 출신 부인 멜라니, 그리고 전 부인 이바나 트럼프도 이 특별한 콘서트를 지켜보았다.
매년 여름 그레이트론에선 뉴욕필하모닉 무료 콘서트가 열려 왔다. 올해는 뉴욕필 콘서트가 취소되면서 앨런 길버트가 지휘하는 뉴욕필이 대신 보첼리와 만난 것이다.보첼리는 ‘여자의 마음(La donna e mobile·리골레토)’ ‘가라, 토스카!(Va, Tosca!·토스카)’ ‘오 아름다운 아가씨(O soave fanciulla·라보엠)’ 등 오페라 아리아에서 ‘볼라레’ ‘푸니쿨라’ 등 이탈리아 노래, 그리고 팝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레퍼토리를 선사했다. 깜짝 게스트 셀린 디옹과는 히트곡 ‘기도’를, 베테랑 가수 토니 베넷과는 ‘뉴욕, 뉴욕’을 노래해 청중의 갈채를 받았다.
피날레 곡은 세라 브라이트먼과 불렀던 메가 히트곡 ‘Time to Say Goodbye(Con te Partiro)’와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투란도트)’로 장식했다. 보첼리는 센트럴파크 콘서트를 앞둔 13일 링컨센터 내 월터리드시어터에서 공개 인터뷰를 했다. 이 자리엔 임신한 약혼녀 베로니카 베르티, 둘째 아들 마테오, 어머니 에디 보첼리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콘서트 위해 30파운드(13.6㎏) 감량
●아버지의 꿈이 당신이 미국에서, 특히 뉴욕에서 공연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실현하게 된 소감은.
“센트럴파크처럼 큰 무대에서 공연하게 될 줄 몰랐다. 특히 셀린 디옹, 토니 버넷, 브린 터플, 데이비드 포스터 등 재능 있는 아티스트들과 공연하게 돼 기쁘다. 아버지가 살아계셔서 이 콘서트를 보셨다면 정말 좋아하셨을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온 것은 나 혼자 이룬 것이 아니다. 신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늘 뉴욕필과 에버리피셔홀에서 세 시간 리허설을 했다. 야외 무대의 리허설은 다를 텐데, 어떻게 준비하나.
“준비는 어디서도 항상 같다. 항상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번 콘서트를 CD와 DVD로 남겨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할 수 있게 돼 기쁘다. 콘서트에서 신곡 5곡을 부를 것이다. 콘서트를 준비하면서 사실 희생도 했다. 이탈리아에서 8월은 바캉스가 아닌가. 그런데 콘서트를 앞두고 한 달간 파스타도 와인도 포기해야 했다(웃음). 난 이탈리아 사람인데 LA에 와 있던 아들이 날 보더니 ‘아빠, 날씬해 보이는걸!’ 하더라.”
●파스타가 목소리에 나쁜가.
“파스타가 문제가 아니라 지방이 해로운 것이다.”(보첼리는 이 다이어트로 30파운드를 뺐다고 했다.)
●오페라가 첫사랑이라고 했다. 지금 오페라는 당신에게 무엇인가.
“어렸을 때부터 학교, 교회, 가정에서 누군가는 노래를 해야 했다. 사람들이 노래를 종종 시켰다. 어떤 때는 친구들과 공놀이를 한 후 피곤한데도 노래를 하라고 했다. 오페라의 큰 볼륨, 아름다운 억양, 깊은 표현력을 좋아한다.”
●젊어서 비틀스와 스티비 원더의 노래를 즐겼다던데.
“난 20대에 늦게 팝송을 발견했다. 대학 시절 피아노 바에서 노래하면서는 오페라를 부를 수 없었다. 그래서 팝을 듣게 됐고, 재미있었다. 팝을 알게 된 것은 새 언어를 배우는 기분이었다. 그때 내가 오페라를 노래하면 친구들은 ‘왜 그렇게 소리를 마구 지르냐? 그만해!’라고 놀리곤 했다.”
●콘서트보다 레코딩을 더 좋아하나. 청중 앞에 서는 것에 공포증이 있다던데.
“난 항상 최선을 다하지만 콘서트 후 들어 보면 100%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안 듣기 시작했다. 스튜디오 레코딩은 마음에 들 때까지 반복 녹음할 수 있기 때문에 선호한다.”
●미국 TV 미니시리즈 ‘소프라노’에, 파스타 광고 ‘바릴라’에도 노래가 쓰였다. 대중문화 속에 등장하는 자신에 대한 생각은.
“내 레코드와 목소리가 너무 여러 곳에서 나오니까 나부터 점점 지겨워졌다. 사람들이 ‘이젠 그만해, 그만해!’ 하는 것 같다.”
오페라는 ‘음악의 파라다이스’
●어려서 울다가도 클래식 음악만 들으면 그쳤다던데.
“6개월 때였을 것이다. 운명이었나 보다.”
●음악적인 가족이었나.
“우리 아버지는 음치셨다. 내게 화가 나셨을 땐 목소리가 무척 크셨지만, 음치셨다. 어머니 쪽은 프로는 아니지만 뮤지션들이 있다. 아마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다. 여덟 살 때 피아노를 시작했는데, 난 게을렀고 그리 잘하지는 못했다. 스무 살 땐 제법 모든 곡을 칠 수 있었다. 노래는 늦게 시작하게 됐다. 난 노래는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공부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못 했다. 음악 코치를 만난 후에야 알게 됐다. 첫 선생님이 ‘넌 아름다운 목소리를 갖고 있는데, 정반대 기법으로 노래한다’고 말했다.”
●피사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1년간 변호사로도 일했다. 어떻게 가수가 됐나.
“노래가 아니고선 아무도 변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도 변호하지 않는 것이 낫다. 나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인생은 이상한 모험의 연속이며, 아무도 미래를 모른다. 난 미래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았으며,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부모님이 노래하겠다는 것을 찬성하던가.
“부모님은 ‘너는 자유니까 하고 싶은 것을 해라’고 하셨다. 하지만 ‘공부부터 해라. 노래는 어려운 도전이니까. 그리고 지금 당장은 우리를 위해서나 노래하라’고 하셨다.”
●전설적 테너 프랑코 코렐리의 문하생이었다.
“우리 집 가정부가 ‘프랑코 코렐리, 라 스칼라, 모든 이를 놀라게 하다’는 신문을 보여주면서 나에게 ‘무척 미남이니 만나 보라’고 했다. 그래서 만나게 됐는데, 보자마자 반했다. 그에게 개인적으로 배우면서 그를 모방했다. 그의 목소리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하루 종일 배우고, 저녁식사에도 초대해 한밤중까지 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데 참 슬픈 일은 내가 유명해지면서 함께 다니면 사람들이 나를 ‘마에스트로’라 부르며 사인을 요청했다. 나의 마에스트로는 사실 프랑코인데, 나는 정말 당황했고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그 후로 그에게 더 이상 배울 수 없었다.”
●당신은 ‘크로스오버 가수’라는 호칭을 싫어한다던데, 이유라면.
“난 크로스오버 콘서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언어는 고유하게 존중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팝송과 오페라의 언어는 다르다.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함께 쓰면, 모두 있지만 결국 아무것도 아닌 셈이 된다. 각 언어의 순수성을 유지해야 한다. 크로스오버를 존중하지만 나는 아니다.”
●오페라가 쇠퇴하는 예술인가.
“그렇지 않다. 사실 극장은 항상 청중으로 가득 차 있다. 이탈리아에선 정기 티켓을 구하려면 누군가 죽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까지 있다. 오페라 극장의 좌석은 스포츠경기나 록 콘서트가 열리는 스타디움보다 적은 2000여 명 내외다. 오페라는 TV에 잘 맞지 않는 예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층은 오페라를 좋아한다. 오페라는 ‘음악의 파라다이스’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라
22일 보첼리는 53세가 됐다. 약혼녀 베로니카 베르티와 사이에 아기도 곧 태어날 예정이다. 그리고 2000년 아버지에게 바쳤던 자서전 『침묵의 음악(The Music of Silence)』 개정판이 이달 말 출간된다.
●회고록 『침묵의 음악』이 11년 만에 개정판으로 나온다. 무엇이 추가됐나.
“당시 책을 급하게 써서 낸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읽으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훗날 수정할 부분도 있었고, 주인공 아모스의 지난 10년간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었다. 자전적 이야기지만 허구다.”
●왜 안드레아가 아니고 아모스를 주인공으로 했나.
“우선 이름이 아름답지 않은가. 그리고 아모스는 오랫동안 나와 아주 가까웠던, 내게 큰 영향을 준 훌륭한 이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에 대한 헌사다.”
(아모스는 안드레아의 열여섯 살짜리 큰아들 이름이기도 하다.)
●플루트와 색소폰도 연주한다. 베르티에 따르면 아들을 위해 작곡도 했다던데, 앞으로 갈 길인가.
“작곡은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라 좋아한다. 여러 곡을 작곡해 녹음도 했지만 작곡은 내 강점이 아니다. 내게 작곡가로 성공하는 것은 머나먼 길이다.”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추천해 이탈리아 록 스타 주커로와 공연하면서 유명해졌다. 교황 앞에서, 빌 클린턴 앞에서도 노래했다. 명성이란 무엇일까(보첼리는 파바로티의 결혼식과 장례식에서 노래했다).
“명성이란 참 이상한 것이다. 우연하게 시작된다. 처음에 명성을 얻으면 호기심도 생기고 흥미 있다. 이후엔 습관이 되며, 무언가를 주지만 한편으론 사생활을 빼앗아 간다. 한 무명의 시골 청년이 ‘안드레아’가 돼 곳곳에서 사인과 악수를 요청 받게 됐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들로부터 일관되게 애정을 느끼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7000만 장 앨범 판매, 빌보드 톱10에 앨범 5개 랭크, 그래미상과 골든글로브상 수상 등 많은 것을 성취했다. 무엇이 남았나.
“내가 꿈꾼 것 이상으로 이루어졌다. 또 더 이상 이기고 싶은 것이 없어서 좋기는 하다. 가수라는 행운의 직업인으로서 정말 중요한 것은 좋은 기억을 남기는 것이다. 우리 애들에게도 말한다. 항상 최선을 다하라. 말로만 해서는 안 되므로 행동으로 보여주려고 한다.
안드레아 보첼리
1958년 토스카니 라 스테르차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녹내장이 있었으나 열두 살 때 축구를 하다 다쳐 시력을 잃었다. 여섯 살 때 피아노를 시작해 플루트, 색소폰, 트럼펫, 트럼본, 하프, 기타에서 드럼까지 두루 악기를 배웠다. 피사대에서 법률을 전공한 후 변호사로 일하면서 피아노 바에서 노래했다. 1994년 산레모 가요제에서 신인상을 수상한 뒤 유럽에서 주목 받았다. 이어 ‘Time to Say Goodbye(Con te Partiro)’가 1200만 장 팔리며 세계적 스타덤에 올랐다.
1998년 셀린 디옹과 듀엣으로 부른 애니메이션 ‘카멜롯을 찾아서’의 주제가 ‘기도(The Prayer)’로 골든글로브 최우수 오리지널송 상을 받았다. 같은 해 피플지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50인’에 선정됐으며, 이듬해엔 1961년 이후 클래식 연주자 최초로 그래미상 최우수 신인상 후보에 올랐다.
클래식 앨범 ‘Sacred Arias’는 500만 장 이상 팔리며 솔로 아티스트로서는 최다 판매 클래식 앨범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2000년 4월 30일 부친이 사망하자 그해 7월 5일 뉴욕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아메리칸 드림: 자유의 여신상 콘서트’를 열었다. 이 공연에서 보첼리는 앙코르곡 ‘꿈(Sogno)’을 아버지에게 바쳤다.
안드레아 보첼리 천상의 노래 … 베스트3
1. 기도(The Prayer)
2. 타임 투 세이 굿바이(Time to Say Goodbye)
3.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
축구로 시력 잃은 보첼리
챔스리그 주제가 애창 … 축구사랑 여전
실제 오페라 무대에 오른 보첼리의 모습은, 사연을 모르는 관객이라면 그가 시각장애인인지 쉽게 알아채기 어렵다. 무대 중앙으로 걸어갈 때면 얇은 실을 이용해 위치를 찾아가기도 하고 연출가에 따라 보첼리를 측면에서 부축하는 캐릭터를 만들어 마음껏 다니게 한다. 동작의 제약이 없는 음반에선 다른 테너들과 완전히 동등한 환경에 있는 것이다.
자신을 실명에 이르게 한 축구에 대한 감정은 온순하다. 지금은 축구장에 갈 기회가 별로 없다고 했지만 ‘스리 테너’처럼 보첼리 역시 광적으로 축구를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눈으로 즐길 순 없지만 유럽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티켓을 구해 경기장의 기운을 느끼거나 주제가를 부르면서 축구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좋아하는 이탈리아 클럽팀을 밝힌 적은 없다.
보첼리는 1990년대 ‘포스트 스리 테너’로 꼽히는 소감에 관한 질문을 싫어했다. 그런 지적을 받을 때면 왜 자신과 호세 쿠라, 로베르토 알라냐를 같은 선상에 놓았는지 기자에게 반문했다. “차세대에는 세 명의 테너가 아닌 30명의 테너가 나와야 한다”던 그도 지난해 내한을 앞두고 이런 유의 질문이 점점 줄어들자 아쉬움을 표했다. 보첼리는 클래식계에서 자신이 여전히 비주류의 음성임을 잘 알고 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자격지심이지만 고등 과정을 거친 걸출한 후배 이탈리아 테너가 나오지 않는 것에 묘한 감정을 갖고 있다. 지난해 보첼리 콘서트를 지휘한 유진 콘은 카랑카랑한 음색과 칸초네에 어울리는 프레이징에 있어서 보첼리를 제압할 테너가 보이지 않는다며 ‘성악 교육의 아이러니’라고 했다.
또한 팝페라 가수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자신을 우상으로 여기는 일 디보, 텐 테너스류의 ‘보첼리 워너비’에 대한 코멘트는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팝페라 신인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자신은 “경음악 콘서트를 한번도 한 적이 없는 클래식 스타”라면서 이제는 팝페라와 선 긋기를 하고 있다.
한정호(음악 칼럼니스트)
[중앙일보] 입력 2011.09.24 01:30 / 수정 2011.09.24 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