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거리
원래 남의 밭에 있던 것을 슬쩍 해와서
화단에 심어놓은 뒤로 내 속셈 모르는 척
적작약이 다신 꽃을 피우지 않았답니다.
제까짓 놈 제까짓 놈 언제까지 영 꽃 안 피우는지
두고보자 벼른 지 몇 해 되는 사이에 그만
나는 눈길을 거두었고, 되는 일이 없었답니다.
날 사로잡아봐야 흰 꽃송이나 도둑당하지 싶어서
에잇 고얀 사람 에잇 고얀 사람 지 맘대로 하라는 건지
적작약이 잎사귀만 내어 보이고 일찌감치 시들었답니다.
서로 본체만체하는 동안에 비로소 알았을까요.
오래 내 눈빛을 받아야 저도 꽃망울을 맺고
제 꽃봉오릴 오래 보여주면 나도 잘된다는 걸
올해는 희디흰 꽃송이를 송이송이 벙글었답니다.
아니, 아니, 한해 더 넘기면 꽃을 피워서는 안될 일이
적작약에게 있었을 겁니다
-하종오
사람의 눈길을 받고 자라는 건 논밭의 곡식뿐이 아니다.
화단의 작약 꽃도 바라보는 사람이 있어야 꽃을 피운다.
서로 본체만체 해서야 당최 꽃을 피우지 않는다. 사람에게도 꽃에게도 기쁨이 없다.
숲길을 걷던 스승이 나뭇가지가 왜 저리 많으냐는 질문을 일으켜 세운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뭇가지는 나무가 세상의 다른 생명체와 관계 맺고 싶어하는 간절한 표현"이라고 덧붙인다.
길섶의 풀꽃들이 이야기를 듣고 박수를 치느라 작은 몸을 부르르 떤다
박수 소리에 멀리 화단의 작약 꽃이 빨갛게 피어난다.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눈길을 받아,
박수를 받아.
내가 자라고 네가 자란다.
한 뼘 씩 커졌다.
꽃봉오리,
고얀사람, 고녀석에게
마음대로 하라며 열어젖혔다.
한해 더 넘기면 안 될 일 있을 수 있지만,
중요치 않다.
피웠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