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짙 붉은 바위 가에
잡고 가는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꺽어 바치겠습니다.
신라 향가인 <헌화가>다,,
배경설화에 따르면 수로부인이 강릉 태수로 부임해가는 남편 순정공을 따라가는 길에
바닷가에서 벼랑위 높은 곳에 한창 피어 있는 철쭉꽃을 보고 "누가 그 꽃을 꺽어 바치겠는가?"하였는데
한 늙은이가 암소를 끌고 지나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꽃을 꺽어다 바치고는 이 노래를 지어 올렸다고 한다.
이 노래는 꽃을 탐하는 아름다운 여인과 소를 몰고 가는 노옹을 대비시켜 아름다움과 속된 것,
노옹의 인자한 자비심을 격조 높게 대비시킨 작품이라고 일컫는 노래다..
그저께 남편의 고등학교 동문회 '송년의 밤' 행사가 있었다. 끝나고 나오는 길이었는데 어느 후배님이 달려와서는 "형수님"하며 내게 건넨 꽃이다. 투명 꽃받침을 한 이 꽃들이 화환에 꽂혀 있는 것은 보았던 지라, 행사 마무리에 내게 줄려고 급하게 몇 송이 뽑아든 꽃이란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꽃을 받는 순간 내 손에 닿는 꽃대의 감촉이 끈적끈적했다. 초록 테이프로 꽃대가 칭칭 감겨져 있었는데 그 촉감이야 씁쓸했지만 꽃을 받아든 기분은 언제나 꽃이 된 기분이니, 좋았다.. .
집에 와서 유리병에 꽃으면서도 싱싱하고 아름다울 수 있도록 전문가의 손길이 간 것이려니, 꽃받침은 꽃이 부러지는 것을 방지하고, 또 더 개화하지 못하게 하여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함이려니 했다. 꽃대 또한 부러짐 방지를 위한 조치리라.
오늘 아침, 무심코 눈에 들어온 꽃송이 속에 철심하나가 1센티 가량 불거져 나와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다른 송이들도 철심을 하나씩 박고 선 것이 그제야 보였다. 청테잎 깁스로는 부족했던지 철사의 힘을 빌리는 것 같았다. 부러지면 해야 할 것을 부러지기 전에 미리 조치를 해 둔 셈이다. 덕분에 이 꽃들은 목이 꺽여도 떨어질 수 없게, 꽃대도 꺽어져도 꺽어질 수 없도록 그렇게 완벽한 꽃다발 장식용으로 손길을 거친 셈인데. 나는 어째 씁쓸해서 삐져나온 철사줄을 빼내고야 말았다.
오래전 스무살적 이었던 때 같다. "학교 정원에 핀 꽃이 이뻐서..."라며 30분도 넘게 버스를 타고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온 이가 있었다. 잎사귀는 시들어 있었지만 그 청년이 꽃이 되어 내게로 달려 온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느껴지는 인상적인 꽃 선물 이었다.
이후, 덩쿨 장미가 캠퍼스 담장너머로 행인들을 탐하던 어느 유월, 그 담장아래를 걷다가 장미에 눈길가는 나를 위해 모자란 키로 까치발하며 월장할 듯 달려들어 결도 질긴 덩쿨장미를 어슬프게 끊어서 내게 주었던 청년도 있었다. ㅋㅋ 후자는 남편이 되었고, 전자는 어디서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ㅎㅎㅎ
행사장이나 기념일 등 꽃다발을 받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플라스틱 치마를 겹겁이 입고, 제것 말고도 보태고 덫칠한 것 같은 꽃장식을 보면, 나는 그것들에 대한 연민이 없지 않았던것 같다. 나만 몰랐는지 원래 장식용이란 것이 이렇게 하는 것인지. 여리고 이쁜 것들에 철심까지 박아야 한다는 건 어째 영 미쁘지 않다.
그동안 받은 꽃들이 적지 않은데도 시들어 고개 떨군 날 것 그대로의 꽃만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수로부인에게 노옹이 건넨 그 마음같은 꽃, 겸손과 존경을 더해서 꽃과 자신을 동일시한 대상을 향한 아름다운 마음이 들어있는 것 같다..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