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백년해로

구름뜰 2012. 1. 14. 12:43

 

 

 

너의 집 앞에 이르니 장관이다

국자 모양의 큰곰자리가 하늘 끝에 거꾸로 처박혀

너의 입에 뜨뜻한 국물을 붓고 있다.

잘도 받아먹는 큰 입의, 천진한 너는 참 장관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 나는 날마다 신기하다.

나의 집 앞에도 같은 별이, 같은 달이 떠 있다는 것에 대하여

하얀 눈이 길의 등을 감싸고 있는 이 비탈에

성큼성큼한 네 발자국이 나의 대문을 향해 이미 있다는 것에 대하여

 

나, 사랑 없이도 밥을 먹을 줄 알고

사랑 없이도 너를 속박할 수 있게 됐다.

너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이고

나는 곧 버려질 사람이고

네가 머물거나 떠나가거나

아무렇지도 않은 나이고 보면

 

아침밥을 꼭 차리겠습니다

노릇하게 구운 살찐 생선살을 당신 밥숟갈에

한 점씩 올려놓기 위하여 젓가락을 들겠습니다.

하루에 한 번씩 걸레질을 꼭 하겠습니다.

당신 속옷을 새벽마다 이부자리 맡에 챙겨놓겠습니다.

나는 나쁜 사람입니다

다음 생애엔 그렇게 하겠습니다

- 김소연 - 소리 소문 없이 그것은 왔다. 문학과 지성사 2000

 

 

 여자이기 때문일까요. 아내라는 이름, 여자라는 이름, 엄마라는 이름으로부터 스스로 걸어 나올때 보이지 않던 내가 더 또렷하게 보일 것도 같습니다. 발이 빠져있을 때는 제가 가진 빛도 어둠도 제대로 보이지 않잖아요! 우리를 수식하는 저 아름다운 이름들, 그 이름들이 우리를 받쳐주는 받침돌이 되기도 하지만 아름다움은 쉬 더러워지고 초라해지고, 명예롭지만 명예는 뒤돌아 치욕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백년해로하기로 했지만 어느 틈엔가 바람 드나드는 벽, 시가 되는 것들은 그런 틈에 있는 것 같습니다. '현모양처'되는 것이 일상적이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현모양처 되는 것이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일이 되어버린 현실을 화자는 순간 붙잡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써야할까, 고민이 되어야겠지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나도 양처가 되자, 아자! 이렇게 써야할지,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겪어야했을 삶의 치열함에 대해 써야할 지, 그도 아니면 나는 어떤 아내인가 써야할지. 아니면 세상에 가장 어려운게 현모양처되는 거라는 식으로 쓰던지! 말은 참 잘하지요? ㅋㅋ 현모양처라는 어휘 자체가 시적인 출발은 아닌 것 같아요. 기존의 질서를 뒤집을 수 있어야 하는데 이건 기존의 가치를 끼워 맞추기 식이 되어버리니....

 <백년해로> 잘 보면 어떤 지점이 시가 되는 지 보일 것도 같습니다. '나 사랑 없이도 밥을 먹을 줄 알고' '사랑 없이도 너를 속박할 수 있게 됐다'는 어떻게 해도 나는 나쁜 사람이니 당신이여, 용서하시라는 시인의 말 처연하지만 꾸밈없는 인식이기도 합니다. 군소리가 길어졌습니다.

-라온제나

 

 지난주 함시사 수업에 가져온 라온제나의 추천시와 시평입니다 제목도 압권이고 다음생엔 그리하겠다는 고백 또한 반전이지요.. 인식!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 공간속에서 인식하고 사는 것과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것들의 차이는 확연히 다르지요. 모습이야 다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내면은 .. 놀랍지요.. 인식이 이쯤 되고 보면 시는 저절로 쓰여 질 것 같지만,, 천만에요.. 공감 가능하다고 시가 쓰인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한 줄 시도 못쓰고 안써지는 걸 보면,, 성근 인식, 이도 저도 못되는  것들 앞에서 늘어나는 건 자괴감 뿐이지요. 참 고약한 습관입니다. 뭐라도 쓰고 싶은습관.. 말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