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구름뜰 2012. 2. 23. 09:40

 

 

 

기억의 동편 기슭에서

그녀가 빨래를 널고 있네. 하얀 빤스 한 장

기억의 빨랫줄에 걸려 함께 허공에서 펄럭이는 낡은 집 한 채

조심성없는 바람은 창문을 흔들고 가네. 그 옥탑방

 

사랑을 하기엔 다소 좁았어도 그 위로 펼쳐진 여름이

외상장부처럼 펄럭이던 눈부신 하늘이. 외려 맑아서

우리는 삶에,

아름다운 그녀에게 즐겁게 외상지며 살았었는데

 

내가 외상졌던 그녀의 입술

해변처럼 부드러웠던 그녀의 허리

걸어 들어갈수록 자꾸만 길을 잃던 그녀의 검은 숲 속

그녀의 숲 속에서 길을 잃던 밤이면

달빛은 활처럼 내 온몸으로 쏟아지고

그녀의 목소리는 리라 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려 왔건만

내가 외상졌던 그 세월은 어느 시간의 뒷골목에

그녀를 한 잎의 여자로 감춰두고 있는지

 

옥타비오 빠쓰를 읽다가 문득 서러워지는 행간의 오후

조심성 없는 바람은 기억의 책갈피를 마구 펼쳐 놓는데

내 아무리 바람 불어간들 이제는 가 닿을 수 없는, 오 옥탑 위의

옥탑 위의 빤스, 서럽게 펄럭이는

우리들 청춘의 아득한 깃발

 

그리하여 다시 서러운 건

물결처럼 밀려오는 서러움 같은 건

외상처럼 사랑을 구걸하던 청춘도 빛바래어

이제는 사람들 모두 돌아간 기억의 해변에서

이리저리 밀리는 물결 위의 희미한 빛으로만 떠돈다는 것

떠도는 빛으로만 남아 있다는 것

-박정대

 

 

 

 

"옥타비오 파스"을 읽다가 "옥탑 위의 빤스"로

이행하는 시인의 연상!이다.

 

시인은 바람이 와서 책갈피를 마구 펼쳐놓는다고 했는데

잘 넘어가지 않는 책장,

잘 생긴 옥타비오 파스가

일주일 채 내 주변만 맴돌고 있다.

 

 겨울바람이 하늘에 닿을 듯 곡을 해도,

 내게 와 닿는 바람은 한 줄기도 없다.

밖에서 바람이 울고 있다.

 

 

 

 

 

에로티즘을 제대로 사유하려는 우리 앞에는

아직도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적 욕망을 여전히 부정적인 것으로 혹은 위험한 것으로 사유하는

전통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에로티즘이 사실 동물적인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역설한 중요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조르쥬 바타이유라는 인물입니다

-강신주.

 

 

에로티즘에는 유혹과 공포, 긍정과 부정의 엇갈림이 있으며,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인간의 에로티즘은 단순한 동물의 성행위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 거꾸로 금기의 대상은 금지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강력한 탐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성적인 것과 관련이 있는 금기는 대체로 대상의 성적가치를 강조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것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짓는 어떤 것으로서,

참을 수 없는, 덧없는, 그리고 의미가 없는 충동,

자유로운 성행위로서의 동물적 충동과는 대립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경계이다.

에로티즘의 역사 - 바타이유.

 

 

 

 

 

 

"금기가 사람의 사물화 경향을 막는다" -바타이유

이 문장을 처음 보았던 지난 여름,

나는 턱 걸리긴 하는데.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하고 지냈다.

 삭히지 못한 무엇처럼,

아니 대추나무에 걸린 연처럼 그렇게 계속 펄럭이고 있었다.

 위의 시와 바타이유의 글, 또 에로티즘에 관한 강신주님의 글을 보면서

 이제사 조금 이해가 간다.

 

 바타이유는  "금지된 것은 인간에게 강력한 욕망을 부여한다"는

통찰을 전제로 한다.

결혼제도 안에서 남편과 아내는 (금기가 없으므로)

금기에서 보다 에로티즘을 훤씬 덜 느낀다는 얘기다.

 즉 금지된 대상에 대한 선망이 없다면

에로티즘이 없다는 주장이다.

 

 

 

 

 

이제 결혼은 성행위와 존경의 결합된 형태가 되었다.

아니 차라리 결혼은 존경의 의미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래도 '통과의례'로서의 '결혼의 순간'만큼은 희미하게나마,

원칙의 수준에서, 위반의 측면을 유지하고 있다.

에로티즘의 역사 -바타이유

 

 

 

 

찰학자들의 학설로

알게되는 인간 내면의 근원적인 이야기들,

강신주님은 간혹 "시와 철학이 폭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시집과 철학이 자신의 일상적 삶을 동요시키는 듯한 불쾌감을 주기때문"이라 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을 까발려 놓는 것 같은,,,

 

어쨌거나 철학은 객관적이며 보편적이라는 말이 맞는것 같다.

금기가 없다면 에로티즘이 없을테고,

에로티즘에 의한 탈선도 없고,

매력적인 대상도 없을테고

존경이나 선망도 없을 것이므로

사람의 삶이 무미 건조할 것이라는

 

하여 무미건조한 동물과 간이 다르게 살고있는 증거,

 사람의 사물화 경향을 막는건 에로티즘인 것이다.

 

 

 

내 아무리 바람불어 간들 이제는 가 닿을 수 없는,

옥탑 위의 빤스는 이제 서럽게 펄럭이는 아득한 깃발이 되었고..

시인은 이제는 갈 수 없는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것만을 바라다 볼 뿐이지만,

.

시인이 진정 찾고 싶고 그리운 것은

그 여인이거나 지나가 버린 그 시절이 아니라.

'에로티즘' 그 자체 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