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비망록

구름뜰 2012. 4. 18. 20:11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 네 살이었다. 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조아리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레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없는 눈물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 네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 네 살엔 좀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 다섯이면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 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 김경미

 

 

 

 

서로 편지나 보내자 삶이여

실물은 전부 헛된 것

만나지 않은 동안만 우리는 비단 감촉처럼 사랑한다

사랑한다 죽도록

만날수록 동백꽃처럼 쉽게 져버리는 길들

실물은 없다 아무곳에도

가끔 편지나 보내어라

선천적으로 수줍고 서늘한 가을인 듯

오직 그것만이 생의 한결같은 그리움이고

서역이리니

- 나의 서역 - 비망록  김경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