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공갈빵 외 3편

구름뜰 2012. 6. 1. 09:04

 

 

 

 

공갈빵

 

엄마 치마꼬리 붙잡고 꽃구경하던 봄날, 우리 엄마 갑자기 내 손을 놓고 그 자리에 어러붙은 듯 걸음을 떼지 못하는 것야 저쯤 우리 아버지, 어떤 여자랑 팔짱 착, 끼고 마주 오다가 우리하고 눈이 딱, 마주친 거지 "현숙이 아버......, "엄마는 아버지를 급하게 불렀고, 아버지는 "뭐라카노, 아주마시! 니. 아요?" 바바리 자락 휘날리며 달아나버린 거지

 

 먹먹하게 서 있는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갑자기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어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배가 고픈 건지, 아픈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서러웠거든 우리가 대문 밀치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버지는 "어디 갔다 인자 오노, 밥 도고!" 시침 딱 갈기고 큰소리쳤고 엄마는 웬일인지 신바람이 나서 상다리가 휘어지게 상을 차렸던 거야 우리 엄마 등신 같았어

 

 

 그러면서 오늘까지 우리 엄마는 아버지의 밥때를 꼭꼭 챙기면서 내내 잘 속았다. 잘 속였다, 고맙습니다. 그 아버지랑 오누이처럼, 올해도 목련이 공갈빵처럼 저기 저렇게 한껏 부풀어 있는 거야   

 

 

 

  

 

 

부도덕으로 살거다 


 머리 실핏줄이 막혀서, 하도 기가 막혀서 덜컥 누워버린 늙은 엄마, 늙은 아버지가 병문안 오면 슬쩍 눈 흘기면서 대놓고“가소, 마”한다 그리고 곧이어 “부도덕한 늙은이!” 혼잣말인 척 짐짓, 다 들리도록 중얼거린다 천 번도 더 들은 저 말, 삼강오륜으로 중무장한 우리엄마는 지금 입만 살아서 링거를 주렁주렁 달고 있지만, 평생 부도덕했던 우리 아버지 팔순을 넘기고도 정정하게 훠이 훠이 세상 끝까지 마실 다닌다

 

 나, 이제부터 무조건 부도덕하게 살거다 도덕 찾다가 늙어, 어느 날 뒷목 잡고 넘어가느니, 요놈의 사탕 같은 세상 실컷 빨면서 들통 나지 않게 시치미 딱 잡아떼고 치맛자락 살살 흔들면서, 살거다

 

 부도덕한 늙은이! 그 누가 뭐라 뭐라 씹어도 끄떡없는 아버지, 지금 엄마 등 쓸어준다 발 닦아준다 에그그, 지금 저토록 행복한 엄마, 그러니까 나, 벽에 똥칠 할 때까지 할 짓 못할 짓, 다 하면서 오래 살거다 그렇게 늙어 꼬부라질 때까지 인간답게 아버지처럼…, 인간답게 엄마처럼…,

 

 

 

 

 

 

 

팬티와 빤스

 

외출을 할 때는 뱀이 허물을 벗듯

우선 빤스부터 벗어야 한다.

 

고무줄이 약간  늘어나 불편하지만, 편안하지만

그래서 빤스지만 땡땡이 물무늬 빤쓰.....

 

집구석용 푸르댕댕 빤쓰는 벗어 버리고

레이스 팬티로 갈아 입어야 한다.

 

앙증맞고 멋있는 꽃부늬 팬티

두다리에 살살 끼우고

약간 마음이 간지럽고 살이 나풀댄다

나는 다시 우아하고 예쁜 레이스공주

 

밖에서 느닷없이 교통사고라도 당한다면

세상에 때땡이 빤쓰인 채로 공개되면 어쩌나

비싼 세콤장치로 만약의 위험에 대비하듯.....

우명 라펠라 팬티로 단단한 무장을 한다

 

오늘 바람이라도 살랑, 불라치면

혹시라도 치마가 팔랑 뒤집힌다면

나 죽어도 꽃무의 레스로 들키고 싶다.

 

 

 

 

 

질투

 
아무래도 녀석 연애질 하는 것 같다
갑자기 멋 부리며 엉덩이 들썩거리다
허깨비에 홀린 듯 박차고 나간 저 문,
밀고 돌아올 시간 벌써 지났다


나는 핸드폰의 단축키를 눌러댄다
허방, 전원을 꺼버렸다
도대체 누구의 꼬드김에 넋이 빠진 걸까?
녀석은 내가 전혀 안중에도 없다
슬그머니 배알 뒤틀린다


여자아이의 정체는 무얼까, 예쁠까, 섹시할까, 혹시 녀석만 다치는 것은 아닐까,
순진한 놈 실컷 쌈 싸 먹히는 건 아닐까,
서툰 하룻밤에 인생을 걸면 어쩌나,
별별 생각 다하며 발 동동 구르다
새벽이다


어라, 도대체 내가 지금
엄마야, 여자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씩, 웃으며 들이닥치는 녀석
보자마자 등짝을 후려치며
눈 하얗게 흘기며
밥 먹었니? 이건 헛소리다


엄마보다 예쁘더나?
좋더나?
살짝 꼬아 물어보면
고개 숙여 머뭇거리다 그렇다고 할까봐
묻지 못했다

 

- 손현숙(1959~) 시모음 입니다.

 

'공갈빵'이라는 시제 재밌지요. 공갈빵! 살다보면 공갈을 치기도 하고, 공갈인줄 알면서도 그 공갈빵 같은 공갈을 공갈이라서 더 맛있어 할 때도 있지요.. 

 

'부도덕으로 살거다' 는 어떻구요.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걸, 이렇게라도 말하고 나면 그렇게 되기라도 할 것 처럼,  된 것처럼 위로받고 싶은 일들이 어디 한 두두가지 일까요.  

 

'팬티와 빤스' 보다가 생각난 일화, 법정 스님 생전 어느날 심하게 앓다가 늦은 밤 혹여 당신이 주그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팬티를 밤에 빨래했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외출의 설렘,기대, 빤스를 팬티로 승화시키고, 레이스 공주로 들키고 싶다는 여성 화자의 마음이 이쁩니다.

 

'질투'라는 시를 보면서 생각난 것은, "엄마, 혹시 내 여자친구를 질투하거나 그런 일은 없길 바래요." 큰아이가 여친을 소개시켜주러 가는 차안에서 내게 한 말입니다. 나는 녀석의 염려는 뒷전이었고 솔직히 내 질투를 염려하는 녀석의 치사랑에 기분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유월 첫 날입니다. 짬 날때마다 시 한편씩 감상하는 시간 가져보세요. 사심없는 시인의 마음이 턱하니 내게 오는 순간, 나도 시가되는 순간입니다. 시 한편 못 쓰더라도 시인의 마음이 되는 순간말입니다. 유월엔 자주 아니 나이들어 갈수록 더 자주 시인의 마음 되어보시길,. 그래서 당신과 내가 그런 마음으로 마주 설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