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전사였다. 어깨는 강인하고 늑골은 당긴 활처럼 팽팽했다. 2년 전 여름 그가 저세상으로 갔을 때 티베트의 풍장(風葬)처럼 홀연한 적멸에 아득해졌다. 정신 놓기 직전까지 앰뷸런스 타기를 거부했단다. 스스로 제 명(命)을 컨트롤하며, 병원살이 없이 갈 길로 갔다. 그의 분신인 아내가 말했다. “살고픈 대로 살았어. 후회 없는 인생이었어.” 번역가 겸 소설가·인문학자. 예순 넷에 세상을 던진 사내, 이윤기다.
이런 그는 실은 ‘자복(自服)하는 인간’이었다. 말과 글로 종종 제 뱃속까지 헤집어 보였다. 어린 시절의 치기 어린 오만, 많이 갖고 가방 끈 긴 자들에 대한 복잡한 심경, 살면서 저지른 실수와 과오. 자기만 입 다물면 될 걸 그는 왜 자꾸 ‘얼굴에 모닥불 붓는 심정’으로 고백하고, 내처 ‘이런 나를 부디 용서 말라’며 손 탁 놔 버리곤 했던 걸까.
그에게 따져 물은 적 있다. “위선인가, 위악인가. ‘나 이런 사람이니 믿어달라’, 이건 위선이고 ‘나 원래 이런 놈이니 건드리지 말라’, 이건 위악이고.” 답은 이랬다. “둘 다 아니야. 외려 위선도 위악도 떨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지. 사람이 자복할 줄 모르면 결국 힘이 달리게 돼. 세상 다 아는 것처럼 떠들다 어느 순간 치명적 실수를 저지르지. 첨부터 아예 못박는 게 나아. 난 잘 모른다, 아직 배우는 사람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자복은 그 대단한 이윤기가 험난한 세상을 헤쳐오며 익힌 생존의 비기 중 하나였다. 빈농의 유복자, 신학대 중퇴. 그래서 200여 권의 문학·인문서를 번역하고 동인문학상을 타고 『이윤기의 그리스·로마 신화』로 우뚝 선 뒤에도 계속된 대한민국 주류 사회의 검증욕을 그는 쿨한 고백으로 머쓱하게 만들어 버리곤 했다.
며칠 전 또 한 명의 자복하는 남자를 봤다. 김두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다. 그의 신간 『욕망해도 괜찮아』는 통째로 고백이다. 평생을 계(戒·규범)의 세계에 속해 온 남자가 자기 안의 색(色·욕망)을 발견하고, 인정하고, 만방에 고하는 이야기다. 이윤기의 삶이 하드코어 액션판타지라면 그의 삶은 소년·소녀 권장도서다. 그래도 자복의 ‘약발’은 덜하지 않다. 세속적 성공 공식과 종교적 금기에 양다리 걸쳐가며 꾹꾹 눌러 온 온갖 욕망들. 이를 헤집고 뒤집고 떨어져 보는 동안 김 교수는 더욱 ‘어른’이 된 듯하다. 그는 제안한다. 너무 쉽게 돌을 집어 들지 말자, 고백에 귀 기울이는 문화를 만들자고.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에 등장하는 ‘마성의 카사노바’ 장성기는 누군가 자신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이렇게 답한다. “아, 그렇구나.” 어떤 얘기에도 우선 귀 기울이고 마음을 연다. 판단은 다음 문제다. 김 교수가 말한 ‘너무 쉽게 돌 들지 않기’는 바로 이런 태도 아닐까. 그러니 남성들이여, 욕망에 너그러워지시라. 자유와 매력이 함께하리니.
이나리 논설위원
[중앙일보] 입력 2012.06.04 00:56 / 수정 2012.06.04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