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야 내려라 억수같이 내려라 억수같이 내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누이의 발길을 돌려놓아라
새벽에 꿈결에 깨어 어 비가 오네 하고 미소 지으며 달콤한 잠 속에 빠지게 해라 비야 노동판을
전전하는 김 씨를 공치게 해라 무더운 여름 맨몸으로 햇빛과 맞서는 김 씨를 그 핑계로 하루 쉬게
해라 비야 내 단골집 철자의 가슴속에서도 내려라 아무도 모르게 가슴속에 꽁꽁 감추어둔 철자의
첫사랑을 데려다 주어라 비야 내려라 내려도 온종일 내려 세상 모든 애인들이 집에서 감자를 삶아
먹게 해라 비야 기왕에 왔으니 한 사흘은 가지 마라 그동안 세상 모든 짐은 달팽이가 져도 충분하게
해라.
- 김승강
어려서 들일 할 적에 기다리던 비. 구름아 몰려와라. 비야 퍼부어라. 빨갛게 달구어진 밭뙈기를
쓸어가 버려라. 이건 물론 못된 생각이었지만, 일만 하고 어찌 산단 말이란 말인가. 일만 하라는
세상은 몹쓸 세상이다. 실업도 비정규직도 알고 보면 더 혹독한 부림이다.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할수록 더 강하게 일에 예속되니까. 일 속에 기쁨을 모시는 법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비야 쏟아져라, 누이와 김 씨와 철자의 버거운 노동의 나날에. 저는 몹시 출근하고 싶었습니다만
부장님, 십장님, 보시다시피 비가, 무슨 놈의 비가… 느긋하고 떳떳한 핑계를 대게 해라. 연인들이
서로의 입에 감자를 넣어주며 가슴이 오그라드는 동안 세상은 달팽이 차지가 되겠네. 찾다가 찾다가
짐을 못 찾아 달팽이는 제 집만 지고 가겠네.
<이영광·시인>
* 비가 와요.
느긋하고 떳떳한 핑계처럼, 새벽부터.
몹시 출근을 하고 싶었습니다만,
비 때문에..같은 비가 옵니다.
불가항력 입니다.
마음도 젖고 말도 젖고 젖습니다.
비가 와요.
비는 오는데
오지 않고,
오고 있습니다.
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