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믿음에 대하여

구름뜰 2012. 8. 21. 08:59

 

 

 

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

피가 날 때까지 믿는다.

금방 날아갈 휘발유 같은 말도 믿는다.

그녀는 낯을 가리지 않고 믿는다.

그녀는 못 믿을 남자도 믿는다..

한 남자가 잘라온 다발 꽃을 믿는다.

꽃다발로 묶인 헛소리를 믿는다.

밑동은 딴 떼 두고

대궁으로 걸어오는 반 토막짜리 사랑도 믿는다.

고장 난 뻐꾸기시계가 4시에 정오를 알렸다.

그녀는 뻐꾸기를 믿는다.

뻐꾸기 울음과 정오 사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의 믿음은 지푸라기처럼 따스하다.

먹먹하게 가는귀먹은

그녀의 믿음 끝에 어떤 것도 들여놓지 못한다.

 

그녀는 못 뽑힌 구멍투성이다.

믿을 때마다 돋아나던 못.

못들은 껴안아야 돋아나던 믿음.

그녀는 매일 밤 피를 닦으며 잠이 든다.

-최문자 (1941~ )

 

 

 

 

버릇에는 아픔이 없다. 아픔은 마음대로 반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늘 새로운 충격이니까.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고통은 반복된다. 반복되는 고통을 늘 새롭게 겪어서는 살 수가 업다. 그래서 그녀는 그것을 낯익은 것으로, 습관적인 것으로 바꾸려 한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버릇도 아픔을 요구한다. 믿음은 못 박힘이 되고, 배신의 순간마다 그녀는 피를 흘린다. 피를 보지 않고는 잠들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믿음은, 다시 아프다. 하지만 믿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누군가의 고통이 있기에 모든 이들이 편히 잠들 수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세상의 남자들은 제 고통 자체를 믿음으로써 겨우 살아가는 이 여자를 모른다. 알면서도 모른 체한다. 사람들은 이 사람을 모른다. 하지만 아프지 않은 모두는 기실 이 아픈 사람과 같이 살고 있다.

-이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