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분꽃이 피면

구름뜰 2012. 9. 11. 11:05

 

 

우물가에 핀

분꽃을 보고

꼬부랑 할매

저녁 차비 하시네

눈이 어두워

시계는 못 봐도

분꽃이 피면

해거름 녘

쌀뜨물을 받아서

분꽃을 주시네

-이문구 (1941~2003)

 

 이문구 하면 소설가로만 알고 있기 십상 이지만 좋은 동시를 참 많이 썼다. 재주 없는 나 같은 사람은 되바라지게 소설을 잘 쓰면 됐지 왜 동시까지 잘 쓰고그래 하는 심정으로 은근한 질투심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렇게 정갈하게. 사람의 온기를 느끼게 할 수 있는가. 얼마 전, 벌초를 하러 고향에 들렀는데 가장 젊다는 형님이 이미 환갑을 훌쩍 넘겼다. 이만한 심성을 가진 분들이. 이만한 심성을 노래할 만한 분들이 없다는 것이 참으로 적막하다. 오늘. 분꽃을 보러 갈 만한. 분꽃을 보고 옛사람들의 삶을 떠올려 볼 만한 여유는 없기 십상이지만, 가만히 이 시 한편을 느껴볼 일이다. 사람살이의 겸허를 느껴볼 일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그것을 기대하기 전에, 누구에겐가 이만한 사람의 냄새를 느끼게 한 적이 있는지 되짚어 볼 일이다. 어쩌다 마주치게 되는, 서산에 붉게 떨어지는 해라도 멈춰 서서 오래 바라볼 일이다, -장철문

 

** 우리집 베란다 분꽃의 어젯밤 모습(위) 오늘 아침 모습(아래)

 

* 할머니가 시계는 못 봐도 분꽃이 피면 저녁 한다는 시가 공감 간다. 지난 칠월부터였던가 나는 밤마다 베란다에 나가서 분꽃을 본다. 작년 구월 처마밑에 오도카니 열지어 선 분꽃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밤에 무심코 눈이 갔고 손이 갔었다. 그리고는 까맣게 잊었다.

 

 올 사월, 그 날 입었던 옷 주머니에서 꽃씨를 보게 되었다. 그것을 화분 두 곳에다 심고 '한 달 쯤은 늦어도 좋으니, 순이라도 튀어 봐라' 했는데, 기다리면 언젠가 만나게 된다고 했던가 놀랍게도 새순 8개가 나왔고, 잘 자랐다. 베란다 다른 화분들은 제쳐놓고 지평을 넓혀 가면서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뽑는 것처럼 자랐다. ㅎㅎ

 

 그러더니 밤마다 꽃을 피웠다. 낮에는 피지 않고 해만 저물면 시계처럼 피었다. 달맞이 꽃은 가로등 빛 아래서도 피는데 분꽃은 밤에만 핀다. 사진을 찍기위해 흐린날에 혹여 하고 들여다 봐도 역시나 밤에만이다. 

 

 날마다 새로 피는 꽃,  분꽃 까만씨 속에는 분이 들어 있어서 분꽃이라고 한단다. 분화장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가슴이 봉곳 올라오던 사춘기시절, 엄마 화장대에서 분칠을 몰래 해보았을 때, 화악 달아오르고 뽀얗게 붉어지기까지 하던 얼굴.. 루즈를 발라보기도 했지만 분화장만큼 달뜨게 하진 못했던.

 

 달빛처럼, 멧방석처럼 펼쳐져 은근하고 부끄런 맛까지 겸한 꽃, 꽃씨를 심고 새순이 나오고 자라는 걸 지켜보고 즐기는 일이 어제 오늘에 이뤄지지 않은 것처럼, 사람사이의  관계도 그렇지 않을까. 윗 시평처럼 나이든 분들이라고 정서가 고울리야 없고 젊다고 걍팍하란 법도 없을터이다.  

 

 내가 뿌린 씨 내가 거두는 맛을 실감한다. 고운 님 보듯 밤마다, 아침이면  소진한 모습이지만 그도 이쁘다. 지난밤 저것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보았으므로, 저것을 기다리고 물을 주고 하였으므로,  어느때 아름다웠던 이가 있다면 그 기억으로 우리는 살아가는 지 모른다. 아침 분꽃에 대한 내 마음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