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습관들

구름뜰 2012. 9. 13. 09:07

 

 

 

 

 

습관들/ 천서봉

 

1

모래를 씹으며 당신을 생각한다

잠깐이지만 아직도 이 별에는 꽃들이 지고 핀다

어느 순간에는 귀가 커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불행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내가 내게로 불려와 무릎을 꿇는 밤에는 순리처럼 무책임한 단어가 없다

모를 일이지만 그건 꽃들 스스로도 고백할 슬픔이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당신을 생각하면 모래가 씹혔던 것인데

지금의 나는 모래를 먼저 씹는다 입은 귀가 없어서 내 말을 귀답아 듣지 못하고

 

 

2

폭식 후에 구토, 수렴 후의 발산 코기토 후의 숨. 그리고 마침내 긴 한숨

 

 

3

이제 가끔은 모래를 씹어도 당신이 오지 않는다 슬프지만

어렵지 않다 이 문장은, 무언가 이상한데 모르게 자연스럽다

그저 꽃 질 때까지 봄이 오지 않은 것이라 쓰자 꽃과 봄이 그러하듯

당신과 모래의 관계에 대하여 나는 별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무랍 던지듯* 또 사막까지 걸어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 무랍 던지듯

 *무랍 (제사후 귀신에게 주는 밥 = 습관) 던지는 행위, 즉 습관의 단상을 10가지로 풀어 놓았다

 

   

1. 관상어가 죽었다. 관상어는 죽었는데 나는 출근을 하고 다시 퇴근한다. 생각한다. 나는 왜 집으로 돌아가는가. 혹은 나는 왜 어디론가 자꾸 돌아가는가.

 

2. 습관과 직관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나이인데 습관의 지지부진과 직관의 신비주의는 묘하게 한 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막의 모래와 바다의 그것이 그러하듯.

 

3. 나이가 들수록 생각을 생략하는 것들이 많아진다. 가령 내가 당신에게 가거나 당신이 내게로 오는 길들, 길들어 우리는 순한 저녁처럼 서로를 안고 자주 운다

 

4. 이 별에서 일어난 결코 잊지 못할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깨달았다. 때로 생각의 주체는 내가 아니며 생각이 오고 싶을 때 온다는 것을. 강박처럼.

 

5. 습관의 거처는 반복되는 일상이다 내 삶의 일정부분을 그는 감당하고 관여한다. 반복은 진화하거나 변질되기 쉬워서 내 삶도 다정하게 썩기 쉽다

 

6. 나는 가까스로 내 시를 변명한다. 혹여 직관이 아닌 습관으로 지저귀고 있지 않은가 반성한다. 습관은 천사 아니면 괴물, 세익스피어의 말이다.

 

7. 다른 별에서 보면 관상어의 죽음조차 습관일지 모르고 모른다는 이 생각조차 습관일지 모른다는 강박이 꼬리를 문다. 어느새 나도 또 미끄러진다

 

8. 그러므로 습관은 우주의 것이거나 모든 존재의 것이겠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 내 명함을 내밀로 어디선가 나는 당신이라고 말해진다.

 

9.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습관에 세 들어 살 수 밖에 없다면 부디 사람에게만은 길들지 않기를 희망한다. 왜냐고 묻다보면 어느새 나는 다시 집에 돌아와 있다.

 

10. 꽃도 모래도 관상어도 나도 당신도 모두 동의반복으로 저물고 있다. 관상어에게 명복을, 당신에게 다행을. 끄트머리엔 늘 한숨이 어울린다. 무랍 던지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