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북천역에서,,
열살이 넘어서 기차를 처음 봤다.
초등학교 등하교 길, 고향마을 저 쪽 산모롱이를 돌아 먼데서도 순식간에 우리 곁을 지나가던, 뽀얀 먼지 꼬랑지를 달고 다니던 버스, 그 버스가 반가워서 였을까. 아이들만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가던 길 멈춰서서 버스기사를 향해 아니면 손님들을 향해 손 흔들어주던 문화가 있었다.
방학이면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청룡열차보다 더 설렜던 시간, 한시간 남짓을 김천 이모집 가는 길은 비포장의 흔들림이 떨림이 되는 시절이었다.
사촌오빠는 지금 생각하면 김천 감천 위 철길이었는데. 감천에서 물놀이 하다 심심하면 철로의 그 뜨거운 열기를 느끼게도 해 주었고, 귀를 대 보면 기차가 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도 가르쳐 주었다. 기차에 대응하는 방법인 양, 철로 위에 돌맹이를 얹어두었다 기차가 지나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도 보여주었다.
적진에 침투하여 폭발물을 설치해놓고 숨어 지켜보는 역전의 용사처럼, 기관사가 알면 호통칠까 풀숲에 숨었다가 기차가 지나고 나면 달려가 보던 기억, 박살 나 있던 잔해들, 지금 생각해보면 돌이 튕겨져 나갔을라나 싶지만, 기억은 왜곡되기 싶고, 내 맘대로니 그 잔해를 보면서 기차의 위력도 실감 했었다.
그 큰 물체는 그렇게 대처의 상징이었다.
기차를 처음 타 본건 스무살이 넘어서 였다.
대구에서 밀양 표충사 답사가는 길이었던 것 같은데, 처음답게 나는 일행의 승차권을 얌전히 모두 모아서 창가에다 두고 내렸다. 탈때만 필요한 것인줄 알았다.
다행히 우리를 인솔해간 리더가 신분이 보장되는 분이어서 그나마 곤욕을 면했던 기억 그 뿐인가 처음 가 본 경주터미널에서 길을 잘 못들어 대구로 가야하는 것을 언양까지 간적이 있다. 그때 한우였나 쇠고기였나 언양의 특산품 간판이 나를 비웃던 기억이란,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다. ㅎㅎㅎ.
이 두 세가지 사건 이후로 나는 개찰이전 노선이나 버스를 탈때도 홈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잘못들면 영 어긋나 버리는 것이 어디 행선지 뿐일까.
동성로나 시내버스에서 소매치기도 몇 차례나 당해보는 바람에, 파출소에 신고를 하러 간 적도 있다. 어느날은 매장에서 탈의실 다녀오는 동안 지갑을 잃은 적이 있고, 매장 주인도 내 몰라라하는데 화가 나서 그 유명한! 중앙파출소에 씩씩거리며 신고하려 들어간 적도 있다. 접수량만 한 건 더 늘리면 할 일 다한 것 같은 모습에서, 느꼇던 묘한 이질감, 분노, 차라리 오지 말것을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경험도 있다.
하소연하는 사람의 심정은 해결이면 고맙겠지만 그도 아니라면 공감도 위로가 될 것을,, 젊은 시절의 실수랄까 경험은 후일을 도모하는데 바람직한 초석이 된다. ㅎㅎ 쓴 일은 경험안하고 터득하면 좋겠지만 본의 아닌 일을 당하더라도 다시 없을 기회로 삼는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으리.
하동 북천역 코스모스와 메밀꽃 축제현장을 다녀왔다. 북천역은 물론 주변 철길을 따라서도 꽃이 많았다. 아쉬운 것은 개화한 꽃들이 적다는 것, 미리 정해둔 날짜고 생물이니 사람힘으로는 안되는 일이기도 하다. 하늘도 도와주고 꽃도 힘내야 하고, 행정업무 보는 사람의 관심도 한 몫 하지 않을까.
앞으로 열흘정도 일정이 남아 있으니 갈 수록 보기에 좋을 듯 했다. 내겐 어릴적 대처의 상징이었던 열차가 관광열차도 탈바꿈된 세상이니, 우리 삶이 얼마나 나아진건지 아님 내가 엄청 출세를 한 건지. 기차여행에 한해서 만은 격세지감을 느낀 여행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