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눈이 단일화에 쏠려 있다. 선거 판도를 결정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단일화를 주장하는 쪽은 그것이 이기는 길이라고 믿고 있는 반면 반대하는 쪽은 이를 막아야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다. 진보인사들은 촛불시위 때처럼 국민의 이름을 들먹이며 단일화를 재촉하고 있다. 반면에 단일화를 비판하면 마치 여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출마 의사를 밝혔으면 투표를 통해 국민의 결정을 따르면 될 일을 왜 막 뒤에서 단일화를 하느냐 못하느냐로 일을 삼는가? 문제는 안철수의 태도다. 더 이상 애매해서는 안 된다. 분명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의 정체성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안철수의 인기는 어디서 왔나? 기존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에서 나온 것이다. 그가 기성 정치인과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나온 것이다. 그가 국회의원 수를 줄이고 정당 보조금 제도를 바꾸겠다고 공약했다. 그러자 여야 정당들은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사사건건 싸우던 그들인데 왜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목소리가 같을까. 왜 정치를 바꾸어보자는 제안에 반대할까. 대의제 민주주의를 하자면 정당정치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우리 정당들이 그에 걸맞게 역할을 해 왔던가? 권력에 눈먼 사람, 출세를 원하는 사람들이 나라의 미래에는 관심도 없이, 보수니 진보니 이념을 내걸며 패거리 싸움을 해 오지 않았던가? 이 나라는 앞으로 더 나가고 싶어도 정치가 발목을 잡고 있다. 아이들이 자라면 그에 맞는 옷을 입히듯 나라도 성장하면 그에 따른 새 제도가 있어야 한다. 우리 정치도 옷을 바꾸어 입혀야 한다. 안철수는 바로 이런 욕구의 상징이었다. 그의 존재이유는 정치개혁에 있다.
정치개혁과 단일화는 상극이다. 단일화는 정치담합이자 권력만을 노린 게임이기 때문이다. 기성 정치인들이 대선 때마다 되풀이하던 짓이었다. 거기에는 국민이 빠져 있다. 우리는 단일화를 제대로 판단해야 한다. 이념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데 무조건 이기고 보자고 짝짓기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런 단일화는 바로 정치개혁의 대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명분상으로 볼 때 안철수가 단일화를 하는 순간 그의 정치개혁은 헛구호가 되는 것이다. 현실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야당이 정권을 쥘 목적으로 정치개혁에 동의해 단일화 했다고 치자. 그 종이 한 장의 약속이 선거 후에 지켜질 것인가? 단일화로 안철수가 정권을 잡았다고 치자. 의원 과반수를 넘는 여당이 국회를 지키고 있는데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이겠는가? 잘못된 수단을 택하면 그 때문에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수단이 목적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안철수의 고민이 있다.
안철수는 이제 시험대에 올랐다. 어느 길을 걷느냐에 따라 그의 정체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한쪽은 넓은 길인데 그 끝에는 권력이 있어 보인다. 다른 쪽은 이상을 향한 좁은 길이다. 그가 권력을 탐하는 인물로 보였다면 애초부터 젊은이들이 그렇게 열광하지 않았을 것이다. 젊은이들이 그를 선택한 이유는 그를 통해 이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변화를 갈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선택을 받는다는 것은 꽃가마를 타는 게 아니다. 선택을 받는다는 것은 고난을 지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고난의 짐을 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보통사람은 감히 나서기를 주저하는 것이다. 그 선택을 수용해 출마를 한 이상 끝까지 스스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변화와 개혁은 이렇게 뜻밖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진심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품은 씨앗은 반드시 싹이 나게 되어 있다. 그는 씨앗을 뿌린 것만으로도 역사에서 한 역할을 이룬 것이다. 반대로 그가 현실을 쫓아간다면 그는 과거 모든 제3의 인물들처럼 역사의 한 포말이 되어 흩어질 뿐이리라.
문창극 대기자
중앙일보 2012년 10월 30일자 문창극 대기자 칼럼입니다. 대기자 답지요.근간에 본 어떤 글보다 공감 갑니다. 글을 읽었을 때 반짝하고 공감주는 글이 있습니다. 씨앗처럼 생명이 있는 글이지요. 그 씨앗이 독자에게 심어지고 또 심어지고, 그것이 시간이 지나 발아되고 싹이나고 꽃이 피는 거 겠지요.
글 쓰는 일이 쉽지 않은 만큼 잘 된 글 보는 기쁨은 큽니다. 작고하신 박완서 선생님은 40년이나 글을 썼는데도 이놈의 짓은 어찌하여 도무지 늘지 않는다는 푸념을 근간의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내 주장이 반대편 사람에게도 그럴수도 있다 내지는 그럴 만도 하다로 받아들여 질려면 전개면에서 논리가 수긍이 가야 되겠지요. 즉 상대의 핵심 주장을 완전히알고 그에 반하는 의견을 타당한 논리로 제시 해야겠지요. 며칠 전 '토론' 과 '토의'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토론은 내 주장이 옳다는 의견이고 토의는 의견을 도출해 내는 과정이라는 글에 공감이 갔습니다.
그래도 아무리 내 주장이 목적인 토론이라도 시청자로서 가끔 참 어이상실 일 때 있지요. 특히 질문도 답도 본질과 상관 없을 때 말입니다. 위 글은 안철수와 단일화의 맹점 잘 짚은 글 같습니다. 이글을 보면서 바람이 있다면 이견(단일화를 강력하게 원하는 사람)을 가진 사람들의 논리정연한 반박의 글을 보고 싶다는 것이지요. 편향되지 않고 균형감각 있는 정직한 토론을 갈망하는 유표권자로서 말입니다.
속시끄러운 안하무인 격의 토론장을 보면 저 사람이 왜 저럴까 시청자를 뭣으로 알고 저러나 싶을 때 있습니다. 스스로 부끄런 짓인 줄 알고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 하기사 대부분 두꺼운 사람들은 자기 할말이 중요하지 상대가 알고 모르고 중요하지 않고나 알아도 모르쇠에 한 일가견하지요.
공감이 결여된 자기 주장, 목소리 큰 사람의 주장 그런 것에서 반짝 하는 생명력 잘 안 보이지요. 같은 말을 두 사람이 해도 다르게 들린다고 합니다. 그건 무슨 말일까요. '그 사람'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다는 것인데 '그 사람'이라서 가능하단 얘긴데.. 참 아이러니 지요. 뒤집어 보면, 우리는 들어도 듣는 게 아니고 봐도 보는게 아닐수도 있습니다. 말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이끼 때문에 더 중요하게 들리는 말 분명 있습니다. 결국 사람이 답이라는 얘기가 될까요.
글은 말이 정제되고 숙성된 느낌을 주지요. 글이 주는 힘은 그래서 말보다 한 수 위지요. 글이 먼저 보이니까요. 결론은 글도 잘쓰고 자기 관리를 잘하고 말도 잘하면 금상첨화라는 얘긴데.. 그게 어디 쉽냐구요. 에공,, 얘기가 삼천포로 빠졌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