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에서 / 오규원
용산에서 /오규원
시에는 무슨 근사한 얘기가 있다고 믿는
낡은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 시에는
아무것도 없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생밖에
믿고 싶어 못 버리는 사람들의
무슨 근사한 이야기의 환상밖에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의지와 이상 속에 자라며 흔들리듯
그대의 사랑도 믿음도 나의 사기도 사기의 확실함도
확실한 그만큼 확실하지 않고
근사한 풀밭에는 잡초가 자란다.
확실하지 않음이나 사랑하는게 어떤가.
시에는 아무것도 없다. 시에는
남아 있는 우리의 생밖에
남아 있는 우리의 생은 우리와 늘 만난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믿고 싶지 않게지만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우리에게 확실한 건 확실하지 않음이나 사랑하겠다는
그 정도가 더 진실에 가까운지 모른다.
아무것도 없다. 있기를 바라는 욕망밖에는
하여 시인은 근사한 풀밭에는 잡초가 자라고
시에는 아무 얘기도 없으며
사랑도 믿음도 확실한 그 만큼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믿고 싶지 않겠지만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근사하게 살고 싶은 욕망의 실체
'아무것도 아닌 시'의 반론이 시의 반열이라고 생각해 보자.
사랑도 믿음도 확실하지 않은 그것
그것만큼 삶을 의미있게 해주는 것이 또 어디 있다고
말하자면 근사하지 않게도 볼 줄 알아라는 것
삶의 균형, 일상, 습관 등 삶의
자세를 얘기하는 것 아닐까.
볕이 좋아서 나선 동네 저수지 산책로
한 바퀴 돌아 오니 눈사람 만들던 여자아이가
눈사람만 두고 가버렸다.
네 식구인데
눈 코 입으로 선 것이 아비인지 어미인지 덩치는 대장이다.
친구에게 눈 코 입좀 붙여 주랬더니
심지 굳은 친구가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거룩한 공사중!이다.
한 잎의 여자/오규원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여자.
죽고 난 뒤의 팬티 /오규원
가벼운 교통 사고를 세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장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와져도 앞 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 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 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도 아닌 죽은 자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의 팬티가 깨끗한 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운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 그와 함께 저수지에서..
저수지가 꽁꽁 얼고 눈까지 덮이고
개인지 다른 동물들이 뛰어다닌 흔적이 곳곳에 보입니다.
저수지 풍경이 근에 보기 드물었던 풍경입니다.
지난 밤 녀석들의 배회가 선명한 증거로 남았습니다.
만나서 반가워 건지. 싸운 건지 교차점에서 흔들린 발자국도 있고 끌린 발자국도 있습니다.
풍경을 담으려다 프레임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그림자 덕분에 그림자 놀이를 했습니다.
나보다 큰 데다 별명이 여자 최민수라 남자처럼 붙어봐!" 했더니
제법 포즈를 취해 준 모습입니다. 연인처럼 보이나요?
사진 제목도 '그와 함께' 정도로 하자고 했지요.....
말이 없어서 한마디 툭 던지면 옳타구나! 반가운 친구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제처럼, 생뚱맞게
"볕이 좋아 저수지 산책 가자?" 하면 하던일 제쳐두고 함게 가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왜 그런지 모르지만. 평소엔 가만 있다가 어느날 전화해서는 툭 건넵니다.
쭈욱 생각해 왔다는 듯이는 아닌데 그래도 서운하지도 않고 반가운.
"밥 먹자"
"조조 할인가자"
"전시장 가자"
한 사오년 쯤 전
어느날은 취재차 미전(美展) 오프닝 시간에 간 적이 있는데
전시장 첫 손님으로 그녀가 나타났고,
만나기로 되어 있던 것처럼 친구가 된, 나 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는데 대학생 되고 지들끼리 모여 찍은 사진 속에서
나를 쏙 빼닮은 막내를 보면서 내 얼굴이 보여서 아들임을 직감했다는
놀라운 눈썰미까지, 어쨋거나 호들갑스럽지 않은 친구덕분에
무게중심(나 보다 실재로 조금더 무겁다 ㅎㅎ)은 이런 거구나 싶은 생각이 들게하는 친구다.
여자 최민수는 동생이 붙여준 별명이다.
빈자리가 필요하다/ 오규원
빈자리도 빈자리가 드나들
빈자리가 필요하다
질서도 문화도
질서와 문화가 드나들 질서와 문화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지식도 지식이 드나들 지식의
빈자리가 필요하고
나도 내가 드나들 나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친구들이여
내가 드나들 자리가 없으면
나의 어리석음이라도 드나들
빈자리가 어디 한구석 필요하다
버스 정류장에서 /오규원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노점을 지키는 저 여자를
버스를 타려고 뛰는 저 남자의
엉덩이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내가 무거워
시가 무거워 배운
작시법을 버리고
버스 정거장에서 견딘다
경찰의 불심 검문에 내미는
내 주민등록증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안 된다면 안되는 모두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어리석은 독자를
배반하는 방법을
오늘도 궁리하고 있다
내가 버스를 기다리며
오지 않는 버스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시를 모르는 사람들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배반을 모르는 시가
있다면 말해 보라
의미하는 모든 것은
배반을 안다 시대의
기가 배반을 알때까지
쮸쮸바를 빨고 있는
저 여자의 입술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이 시 좋지요.
시 쓰고 싶어 앉았다가
아니 오늘 시 한편 쓰야하는 숙제 때문에 앉았다가
이러고 노는 나도 시라고
그렇게 그냥 다 시라고 하면 안되나요,
당신도,
나도,
그냥, 다 시라고 하면 안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