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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매며 & 배를 밀며

구름뜰 2013. 2. 28. 09:41

배를 매며/장석남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일도 없으면서 넋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배를 밀며/장석남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

-장석남, 왼쪽 가슴아래께에 온 통증, 창작과 비평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