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 혹은 '경계'의 시학
배추나 무 같은 채소는 뿌리와 잎의 경계 지점에 가장 영양소가 많다. 과일 역시 껍질 바로 안쪽, 과육과 껍질이 맞물린 지점에 비타민이 몰려 있다고 한다. 껍질째 먹으라는 말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사물의 핵심적인 부분은 그 사물의 두 성분이 만나는 지점,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사이'란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사이란 단어는 필연적으로 두 개 이상의 의미소를 필요로 한다. 흔히 사물과 사물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 그때의 '사이'란 관계가 존재한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달리 말하면 관계함으로써 '사이'가 가능해지는데. 우리의 살아가는 이야기도 어떤 대상과 대상이 서로 관계하는 일, 그사이에서 발생하는 내용들이라 하겠다.
삶에 있어서 경계의 부분은 어떠한가. 우선 시간적인 경계로서의 '사이'를 살펴보자. '여름' 혹은 '가을'이라 뭉뚱그려 이야기할 때보다 '여름과 가을 사이'라고 말할 때, 그리고 '3시' 혹은 '4시'라고 말할 때보다 '3시와 4시 사이'라 할 때 어떤 관계가 형성됨을 알게 된다. 우리가 '새벽'이란 말과 '저녁'이란 말을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각기 밤과 아침 사이, 낮과 밤의 경계에 존재하는 '사이' 이기 때문이며, 그 사이에 조성되는 미묘한 정서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공간적인 경계를 살펴보자. 생명체는 대개 물체와 물체의 틈에 기생한다. 바위 자체. 돌 자체에는 아무 것도 깃들 수 없다. 돌 틈에 가재와 새우가 살며 바위에 생긴 가느다란 틈을 비집고 난촉이 올라온다. 음식과 공기가 맞닿는 지점에 부패가 일어나며 그것은 곧 다른 생명체가 탄생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삶의 모든 희노애락 역시 사람과 사람 사이, 삶과 죽음 사이, 희망과 절망 사이에 존재한다.
이처럼 삶의 내용은 무수한 경계와 경계 사이에서 발생하고 수렴된다.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둔 안과 밖이 그렇고 사랑하면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애정이 그렇고,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가기도 하는 삶의 섭리가 또한 그렇다. 그렇다면 시의 경계란 무엇일까. 그것은 이쪽도 아니고 이쪽 아닌 곳도 아닌 미묘한 지점이다. 그렇다고 내면도 아니고 외면도 아니며 나도 아니고 나 아닌 것도 아닌 그런 역설적인 지점이라 하겠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 역시 그렇다. '나'혹은 '너'라고 하면 그저 각기 독립된 개체들일 뿐이다. '나와 너 사이'라고 할 때 비로소 사랑이나 미움이나 갈등 등 삶의 질곡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생로병사의 삶을 이루는 내용이 된다. 그리고 더 중요한 말은 사이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상처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에게는 지각과 감정과 욕망이 있으므로 '사이'에 웅크린 상처라는 짐승이 있다. 상처가 키운 것이 예술이다. 그 상처를 언어라는 형식에 얹으면 훌륭한 시가 됨은 말할 것도 없다.
시는 실제와 상상의 결합에서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대상들은 서로 마주하면서 충돌하거나 화해하게 된다. 그렇다면 인식에 있어서 '사이'란 그러한 현실로서의 외연과 자아로서의 내연의 충돌이 섬광처럼 일어나는 지점이 아닐까. 나와 분열된 나 사이에 어떤 종류의 욕망들은 상처가 되며 아이러니하게도 그 상처가 승화된 것이 꽃이란 걸 우리는 안다. 다만, 그 상처를 민첩하게 언어로 포착하여 삶의 진실을 건져내는 일이 시쓰기일 터이다. 나는 그것을 아름다움이라 부르고 싶다.
달리 말하면 '사이의 미학'이란 곧 경계가 갖는 아름다움이라 하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사실 금을 긋듯 명확하게 밝힐 부분이 그리 많지 않다. 종이는 종이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고 나무는 나무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 역시 사랑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달리 말해 종이는 나무, 불, 물의 교집합이며 나무는 빛과 물과 공기의 상호작용에 의해 탄생한 결과물이다. 사랑 역시 사랑 아닌 것, 즉 미움과 원망과 질투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 가운데 하나를 보기는 여간 어렵지 않다. 하나의 별을 잘 보려면 그 별을 보기보다 그 옆에 것을 보면 된다는 말이 있다. 어떤 일을 해결하기 위해선 그 일을 파헤치기보다 그 일이 아닌 곳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것이 지름길일 때가 많다는 것과 같다. 그것은 A를 알기 위해선 A가 아닌 것을 파악할 때 더욱 분명하게 A를 알게 된다는 논리와 같은 맥락이다. A와 A아닌 것 사이, 나는 그 사이를 시가 탄생하는 지점이라 본다.
이처럼 대상과 대상들이 서로 미끄러지는 자리, 불화하는 자리에서 시는 흘러나온다. 그 불화하는 자리란 말할 것도 없이 아픔이 있는 곳이며, 아픔으로써 다른 아픔을 만지며 이해하는 자리이며, 그 연민으로 인하여 치유하는 힘을 가지기도 하는 곳이다. 시가 힘을 가지는 때는 그런 순간이다. 시의 힘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아름답고 거창하고 완성된 것에서는 시가 나오지 않는다. 누추하고 비루하고 버림받은 것에 시가 있는 까닭은 그곳엔 삶이 지나간 흔적이 있기 때문이란 말에 동의한다. 이러한 말 역시 '사이의 미학'을 보여준다. 시가 흘러나오는 곳은 우리가 감춰 두었다는 사실마저도 알지 못하는 무의식의 공간, 또는 부끄러움과 비참함 때문에 밀봉해 두었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공간. 보이지도 않으며 만질수도 없는 그런 경계인 곳, 더하여 시가 아니면 도저히 비집고 들어 갈 수 없는 바로 그곳이 아닐까.
그러나 무엇보다 '사이'가 중요한 것은 각기 단절된 것을 연결해 주는 매개성을 가진 때문이며, 앞서 간 것과 뒤에 올 것을 서로 지속케 하는 역사성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모든 유기체들 역시 그런 순환의 고리를 가짐으로 존재가 가능하다 하겠다. 장황해졌지만 한마디로 나는 내시의 근저를 '사이'혹은 '경계'에 두고 싶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그 '사이'나 '경계'는 존재하거나 부재하기도 한다. 나의 시가 그렇듯이 말이다.
-이 글은 2010년 5월 진주 화요문학회가 주체한 <화요문학회가 만난 이달의 시인 이규리> 팸플릿 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