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글쓰기 작업

구름뜰 2013. 6. 26. 08:26

 

 

드디어 긴 원고작업이 끝났다.
갑자기 펜이 너무 무거워졌다.
난 지금까지 펜이 가는 대로 썼을 뿐이었다.
펜은 정상인이 맹인을 안내하듯
아름다운 여인이 당신을 춤으로 유혹하듯
나의 손을 이끌어 주었다.

그래서 원고작업은 만족스럽게 끝났다.
만약 어느 단어 하나만 빼더라도
잉크가 샐 정도로 문장에 구멍이 날 테고
어느 단어 하나를 더 추가해버린다면
불협화음처럼 조화가 왕창 깨어질 테지.
물론 한 문장이라도 바꾸면 전체 분위기 역시
개들이 짖는 콘서트처럼 확 바뀌겠지.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작품과 자기 자신을 분리시킬 것인가?
작품이 끝날 때마다 나는 한 번씩 죽는다.

-프리모 레비(1919~87), 이산하 편역

영화 ‘미저리’에 등장하는 소설가는 오래전부터 구상했던 제 작품을 마무리하고 그제야 한참을 참았다는 듯, 서랍 속에서 시가 하나를 꺼내 입에 문다. 새로운 소설의 탄생을 자축하기 위해 어렵게 끊어냈을 저 흡연의 유혹을 한번쯤 용인하기로 한 것이리라. 그런데 문제는 모두가 소설가가 아니라는 데 있다. 짤막한 논평을 쓰는 사람, 토막 에세이 집필을 업으로 삼는 사람, 분량이 적은 시를 쓰는 사람에게도 제 글을 완성했다고 기뻐하며 다시 문 담배가 그만큼 의미가 있을까? 이 글만, 제발 이 글만 끝나면, 하고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린다. 어쨌든 나는 오늘 연재분을 마감했으니, 한번 죽은 셈이고, 그 대가로 담배를 피울 자격도 있다.

-조재룡 <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