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구름뜰 2013. 7. 9. 09:02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심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라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없이 심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것이다.

 

 

 

 

 

삼십대 

 

 

난 다 자랐다, 삼십대, 청춘은 껌처럼 씹고 버렸다. 가끔 눈물이 흘렀으나 그것을 기적이라 믿지 않았다. 다만 깜짝 놀라 친구들에게 전화질이나 해댈뿐, 뭐 하고 사니, 산책은 나의 종교, 하품은 나의 기도문, 귀의할 곳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 공원에 나가 사진도 찍고 김밥도 먹었다. 평화로웠으나, 삼십대, 평화가 그리 믿을 만한 것이겠나. 비행운에 할퀴운 하늘이 순식간에 아무는 것을 잔디밭에 누워 바라보았다. 내 속 어딘가에 고여있는 하얀피, 꿈속에, 니가 나타났다. 다음날 꿈에도, 같은 자리에 니가 서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너랑 닮은 새였다.(제발 날아가지마) 삼십대, 다자랐는데 왜 사나, 사랑은 여전히 오는가, 여전히 아픈가, 여전히 신열에 몸 들뜨나, 산책에서 돌아오면 이 텅빈 방, 누군가 잠시 들러 침만 뱉고 떠나도 한계절 따뜻하리. 음악을 고르고 차를 끓이고, 책장을 넘기고 화분에 물을주고, 이것을 아늑한 휴일이라 부른다면 뭐, 그렇다 치자. 창밖, 가을비 내린다. 삼십대, 나 흐르는 빗물 오래오래 바라보며, 사는 둥 마는 둥 살아간다.

 

 

 

 

 

여, 자로 끝나는 시  

 

안녕하세여, 어디가세여, 나 몰라라 도망가지 말아여, 우리 피시방에서 만났던가여, 아니, 전생이었던 것 같네여, 어떻게 지내셨어여, 전 오늘 좀 슬퍼여, 사실 애인이랑 막 헤어졌어여, 육 개월 동안 밤마다 애무하던 그녀 다리가 의족인 줄 어제서야 알았어여, 뭘여, 제가 나쁜놈이지여, 저 위 좀 보세여, 저놈의 달은, 누가 자기 자리 뺏어갈까봐 낮부터 저러고 버티고 있네여, 참 유치하지여, 한 백 년 만인가여, 기억나세여, 당신의 아버지를 어머니라고 부르곤 했지여, 그냥 친근해서여, 전 호부호형 안 해여, 다 어머니라고 해여, 제 삶은 홍길동전과 오이디푸스 신화의 희극적 만남이지여, 도대체 누구냐고여, 몇 생 전이던가여, 우리 어느 심하게 게으른 나라의 국가대표 산책팀 소속이었자나여, 기억 안 나세여, 왜 저보고 사는 게, 납치할 아이 하나 없는 세상의 유괴범처럼 황당하게 외롭다고 그랬자나여, 불어였던가여, 스페인어였던가여, 왜, R 발음에 세상에 모든 부조리를 우겨 넣은 듯한 언어로 말했잖아여, 그렇지여, 첫번째 생 다음은 다 후렴구이지여, 그렇지여, 신은 희로애락을 무한의 버전으로 믹싱하는 DJ지여, 그렇지여, 우리 인간은 그 리듬에 맞춰 춤이나 출 따름이지여, 같이 커피나 한 잔 하실래여, 전 크림 안 넣어여, 하얀 게 뭉게뭉게 번져가는 걸 보고 있음 괜히 기분 나빠져여, 뻔한 성적 상상력에 지나친 예민함이라고나 할까여, 누구 기다리세여, 다행이군여, 요새는 뭐 하시나여, 전 요새 시 다시 쓰고 있어여, 사실은 아무거나 쓰고 이거 시다, 그러고 있어여, 엊그저께는 이력서에 사진까지 붙이고, 이거 시다, 이거 이력서 아니다, 그랬지여, 취직은 몇 번의 후생에나 가능하다 여겨집니다여, 아, 제가 이상한 놈으로 보이나여, 님의 표정이 불편하다는 의사를 살짝 비춰주시네여, 그러세여, 붙잡지 않겠어여, 커피 값은 제가...... 아, 그래주면 고맙지여, 안녕히가세여, 시간 뺏어서 죄송합니다여, 다음 생에 볼 수 있음 또 보지, 아님 말지,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