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밥상에서 글 쓴다

구름뜰 2013. 7. 17. 08:53

 

 


 

 

마땅한 책상이 없어 밥상에서 글 쓴다
재경이 유치원 보내고 재경이 아빠 가게
가면 밥상을 펴놓고 글 쓴다
글 써서 밥 벌고 싶어 밥상에 글 쓴다
밥은 못 벌어도 반찬값이라도 벌고 싶어
밥상에서 글 쓴다 재경이 과자값이라도
벌까 싶어 밥상에서 글 쓴다
밥이라고 쓰면 하얀 김이 나는 밥이 나오고
반찬이라고 쓰면 갈치 콩나물 두부가 쏟아지고
아버지 칠순이라고 쓰면 백만 원이 뚝 떨어지는
도깨비방망이 같은 환상을
하나하나 지워가며 글 쓴다
글만 쓰고 있어도 배가 부를
경지가 될 때까지 밥상에서 글 쓴다
밥상이 내게 마땅한 책상이 될 때까지
밥상에서 글 쓴다
아! 이 빌어먹을 책상물림

- 성미정(1967~ )

 

 




 소설 원고로 제 빚을 탕감하려 했던 발자크는 생각해보면 미친 인간이었다. 제법 유명해져서 고료를 후하게 받게 되었을 때도 빚은 불어나기만 했다. 그는 사업에 젬병이었던 것이다. 출판업과 인쇄업, 광산에 투자했으나 남은 것은 빚더미뿐이었다. 그러나 실패와 파산의 경험을 제 글에 담을 줄 알았기에 신이 그를 저버린 것은 아니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어떻게 재산을 부풀리고 남과의 예기치 않은 소송에서 이길 것인가?’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타인을 어떻게 속여먹을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책상이 밥상이 될 때까지 하루 열다섯 시간 이상을 글 쓰는 데 바쳤지만 빚은 줄어들지 않았다. 평생 돈에 쪼들렸지만 그 덕분에 자본주의의 본질을 꿰뚫는 글을 쓰며 리얼리즘을 요란하고도 리얼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고나 할까. - 조재룡·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