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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저 글 쓰게 해주세요' 성모를 향한 기도 쉼 없으리…

구름뜰 2013. 9. 27. 08:40

 

 

빼곡한 사전, 눌러 쓴 원고 … 창작의 온기 고스란히

 

마지막 집필실 찾아가 보니
투병 기간에도 매일 나와 일해
손때 묻은 성경이 고인을 지켜
후배 위로했던 박완서의 편지도

 

 

 서울 한남동 최인호 작가(1945~2013)의 집필실 책상 한가운데에 소화(小花) 테레사 성녀의 사진이 놓여있다. 24세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숨진 테레사 성녀는 투병 중에도 이웃과 세상을 향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최인호는 테레사 수녀에게서 암과 싸우는 힘을 얻었다. [김경빈 기자]

‘피어나지 않으면 꽃이 아니고, 노래 부르지 않으면 새가 아니듯, 글을 쓰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작가가 아니다.’ (『최인호의 인생』)

 암투병 5년 끝에 25일 세상을 떠난 최인호(1945~2013)는 죽는 순간까지 작가이고자 했다. 병들어가는 육신은 창작에 대한 열정을 지폈을 뿐이다.

 26일, 고인이 2002년부터 타계 직전까지 집필했던 서울 한남동의 출판사 여백미디어를 찾았다. 10여명의 직원이 책을 만드는 이 곳에 작가의 방이 있었다. 암 투병 전후로 썼던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의 인생』 등이 이 방에서 태어났다. 책상 위엔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빈 원고지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작가는 컴퓨터를 쓰지 않았다. 수많은 이야기는 이 원고지와 만년필에서 시작됐다.

 그는 악필로 유명했는데, 아무도 읽지 못해 편집자에게 직접 쓴 글을 읽어줬다고 한다. 사실 그가 악필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작가는 구상을 오래 한 뒤, 한 번에 집필하는 스타일이었다. 이야기를 토해낼 때 손이 머리를 따라가지 못한 셈이다. 여백미디어 서경현 대표는 “머릿속에 컴퓨터가 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 누구도 방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고인은 지난 추석, 병원 입원 직전까지 이 사무실로 출근했다. 오전 9시쯤 도착해 작품 구상이나 집필을 하고 나서 오후 6시쯤 퇴근했다. 젊은 작가들의 신작 소설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책꽂이엔 편혜영 작가가 지난 8월 펴낸 소설집 『밤이 지나간다』가 놓여 있었다. 한 켠에 가지런히 꽂힌 국어사전, 영한사전, 고사성어 백과사전에선 모국어와 분투한 고인의 일생이 전해졌다. 그는 추석 전만해도 “걱정하지 마라. 몸이 나으면 열심히 쓸 테니까”라며 직원들을 다독였다고 한다.

 

 최인호씨의 손주가 연필로 그린 고인의 초상화. (사진 위) 아래는 선배작가 박완서씨가 생전에 고인에게 책을 보내며 동봉했던 편지.

 

 병마와 싸울 때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 건 신앙이었다. 손때로 누렇게 변색된 성서는 육중한 무게로 책상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고인은 프랑스 성녀 소화(小花) 데레사(1873~97) 수녀의 사진 앞에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눈물의 기도를 올렸다. “글 좀 쓰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 때문에 책상엔 눈물 자욱이 자주 찍혔다. 죽기 직전까지도 예수의 생애를 소설로 쓰고 싶어했다.

 가족·친지에 대한 애끓는 애정도 전해졌다. 손주가 그린 초상화, 어린 시절 형제들과 찍은 사진, 아내와 즐거웠던 한 때를 담은 흑백사진은 늘 그의 곁을 지켰다. 벽 한 켠엔 박완서(1931~2011) 작가가 생전에 고인에게 보냈던 편지가 붙어있었다.

 박 작가는 “나도 기도를 보태겠습니다. 제 기도는 나보다 먼저 최인호를 데려가면 가만 안 있겠다는 하느님을 향한 으름장입니다. 나는 백 살까지 살 작정이니까 앞으로 이십 년 이상은 내가 보장할게요”라며 후배 작가를 위로했다.

 고인은 사무실에서 전혀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출판사 직원들의 금기어는 “몸은 괜찮으시냐”였다. 걱정스런 눈빛으로 안부를 물으면 작가가 되려 호통을 쳤기 때문이다. 고인은 방사선 치료로 목이 부었지만 죽 대신 밥을 먹으려고 할 정도로 생의 의지를 불태웠다.

 서 대표는 “차라리 환자처럼 사셨으면 더 편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환자 행세를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고인은 글 못쓰는 배고픔이 가장 두려웠다. 죽음과 가까워질 수록 생의 이유는 분명해졌다. 그것은 문학이었다.
글=김효은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최인호 선생 영전에 - 김연수

최인호 선생이 뜻밖의 말씀을 하신 건 2010년 가을, 독서당길 작업실에 앉아 있을 때였다. 아마도 선생이 침샘암을 선고받고도 2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겠다. 견디기 힘든 방사선치료와 항암치료가 거듭됐을 그 2년의 고통을 내가 어떻게 짐작하겠느냐마는 내가 염려한 것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인 의기소침이었다.

병상에 눕기 전, 선생이 뭔가에 대해 말씀하실 때면 나는 늘 봄날의 숭어를 떠올렸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청년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건 그에게 천직과 같다. 그런데 죽음이라니. 어떤 사람이 있어 그에게 그걸 받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누구도, 또 그 누구에게도 받아들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게 죽음이니 죽음이라는 크나큰 고통 앞에서 인간은 오히려 외로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라고 나는 혼자 짐작했다. 어느 정도 치료가 끝나고 처음 뵈었을 때, 최인호 선생은 이미 그 진실을 경험한 듯 보였다. 그는 방사선 치료를 받은 목에 스카프를 두르고 나를 맞이했다. 환하게 웃는 미소는 여전했는데도 나는 좀 충격을 받았다. 내가 알던 그 청년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내 앞에 앉은 사람은 평생 고생만 해서 몸이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시골 할머니 같았다. 병 앞에 인간의 몸이 그토록 연약하다는 게 어이가 없어서 서러울 정도였다.

 2010년 가을이라면 그렇게 위태위태한 선생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날들 중 하나였으리라. 무슨 얘기 끝엔가 그가 문득 내게 돌아오는 봄에 장편소설을 출간할 테니 발문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처음에 나는 그게 무슨 말인가 했다. 장편소설을 새로 쓰신다는 말씀이냐고 다시 여쭸다. 그랬더니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반인도 아니고 평생 장편소설을 쓰신 분이, 아니, 도대체 어떻게 장편소설을 쓰신다는 것인지. 장편소설을 쓰는데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지 선생이 가장 잘 알 것이기에 이런 역설적인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쓴다고 했다. 방금 쓴 이 문장은 내게 마치 ‘그는 산다고 했다’로 읽힌다. 실제로 선생의 ‘쓴다’는 말을 나는 그렇게 들었다.

 그렇게 낙엽이 떨어지고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 꽃이 피었다. 그런 일들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그리고 2011년 봄, 최인호의 신작 장편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의 원고가 내 손에 들어왔다. 원고를 다 읽고 나서야 나는 내가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진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내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청년 최인호가 바로 그 원고 속에 있었던 것이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에는 그가 청년 시절부터 써온 주제가 고스란히 다 들어 있었다. 가장 외로운 순간에 그에게는 소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생에게 청년이란 소설과 동의어였다.

그 무렵, 성모를 향한 선생의 기도는 다음과 같았다.

 “아이고 어머니. 엄마. 저 글 쓰게 해주세요. 앙앙앙앙. 아드님 예수께 인호가 글 좀 쓰게 해달라고 일러주세요. 엄마, 오마니! 때가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드님은 오마니의 부탁을 거절하지는 못 하실 것입니다. 앵앵앵앵. 오마니. 저를 포도주로 만들게 해주세요.”

 선생은 자신의 이런 기도를 막무가내 떼쓰기 기도라고 했다. 항암치료로 빠진 손톱에 골무를 끼워가며 매일 30매씩 손으로 써 내려간 장편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바로 그 기도의 응답이었다. 선생은 늘 소설가로 죽고 싶다고 말했으니, 지금은 그의 소망이 마침내 이뤄지는 가을이다. 이젠 편히 쉬셔도 될 테지만, 아마 내가 아는 선생은 지금도 계속 소설을 쓰고 계실 듯하다. 거기가 어디든.

 그럼에도 이제와 새삼 그리운 것은 새로 펴낸 소설이라며 책을 내게 건네던 그 순간이다. 이제 다시는 그럴 일이 없겠지. 내가 선생의 신작을 읽는 일은 이제 내가 사는 이 세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겠지. 나는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 순간을 떠올려본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으면서 선생은 펜으로 책 앞에 뭔가를 쓴다. 바람이 불고 꽃이 피는 것처럼 별 일이 아니라는 듯이 그는 내게 책을 건넨다. 그럴 때 보면 웃는 그의 얼굴이 눈부실 정도로 환하다. 책을 받아서 몇 장 넘기면 거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세로로 써 내려간 글자들이 보인다. ‘사랑하는 김연수’.

 고등학교 재학 중에 신춘문예로 등단한 소설가로서 선생의 천재성, 감각적인 문체와 현대적인 주제로 한국 소설에 기여한 공로, 그의 소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청춘의 한때를 보낸 수많은 독자들의 성원 등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이 자명하니, 나는 오로지 이 사랑, 영원한 청년이 내게 건넨 이 사랑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그가 좋아했던 아폴리네르의 시로 먼 길에 나서는 선생을 배웅하고자 한다.

 

 

“그가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들이 대답했다.

우린 두렵습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들이 왔다.

그는 그들을 밀어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날았다.”


부디, 이제 두려움 없이 훨훨 날으시길.

- 소설가 김연수  

 

9월 27일 중앙일보 문화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