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돌이켜보면 그건 엄청난 오해요 자만이었던 셈이다. 내 이름은 ‘난달라’. 4년 전 빵집을 차렸다. 막 프랜차이즈를 시작한 신생 브랜드를 택했다. 업계 1위인 P사보다 조건이 엄청 좋았다. 목은 최고라던 종로통. 임대료 높고 권리금도 비쌌지만 상관 안 했다. “돈값을 할 겁니다.” 창업 컨설팅 직원의 혀는 그때 얼마나 달콤하고 부드러웠던가. 퇴직금을 몽땅 털어넣었다. 주변에선 백이면 백 말렸지만 들은 체도 안 했다. 내가 누군가. 나는 다르다, 난달라 아닌가. 하지만 4년이 흐른 지금, 남은 건 후회뿐이다.
결정부터 성급했다. 열심히 뛰면 내 월급은 가져가겠지 생각했다. 본사에서 제빵사 보내줘, 아르바이트생 구해줘, 관리 직원 보내줘, 교육시켜 줘, 뭐가 어려울까 싶었다. 아내와 둘이 새벽부터 밤까지 뛰면 저축도 가능하리라. 완전 오산이었다. 가게 문을 연 순간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흑자를 낸 적이 없다. 경기는 왜 이리 급속히 나빠지는지. 고객은 씀씀이를 줄였다. 1000원짜리 빵 하나 사면서 포인트, 에누리까지 다 챙기는 손 작은 손님만 늘었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서너 시간 죽치는 아저씨들은 왜 이리 밉상인지.
엎친 데 덮친 격, P사가 개업 두 달 만에 바로 옆에 빵집을 냈다. 말로만 듣던 경쟁사 잡아먹기다. 매출은 뚝뚝 눈에 보이게 떨어졌다. 월 6000만원 매출이 돼야 소위 ‘똔똔’을 맞출 수 있었지만, 잘해야 4000만원이 고작이었다. 빚으로 꾸려가는 나날이 이어졌다.
결정타는 권리금이었다. 장사가 안 돼 주변 임대료는 떨어졌지만, 건물주는 2년 계약이 끝나자 20% 넘게 월세를 올렸다. 내가 못 견디고 나가면 권리금만큼 임대료를 올릴 수 있다는 건물주의 얄팍한 계산을 알았지만 대항할 방법이 없다. 1억원이 넘는 권리금이 허공에 뜰 판이었다. “사정 좀 봐달라”며 애걸했지만 건물주는 “퇴직금 들고 장사하려는 이가 줄을 섰다”며 “법대로 하자”는 말만 했다. 결국 내 퇴직금은 고스란히 권리금이란 괴물의 먹잇감이 돼버렸다.
대책은 없나. 묻고 수소문하고 검색했다. 없었다. 권리금은 현실엔 있지만 법에는 없다. 법의 보호 밖이다. ‘권리금 안내’란 인터넷 카페에도 가입했다. 회원이 수백 명이다. 나 같은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하기야 베이비부머(1955~63년생)는 712만 명이나 된다. 인구의 14.6%다. ‘2년치 수익을 권리금으로 인정하라’ ‘임차 기간을 10년으로 늘려라’ 나름 대안과 주장은 많지만 해답은 없었다. 그런데도 창업 컨설팅 업체는 권리금 높은 점포만 소개한다. 권리금의 10%를 수수료로 떼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속칭 ‘날파리’도 끼어들었다. “사장님 많이 어려우시죠. 권리금이 1억5000만원 맞지요? 물주가 나왔는데 계약하려면 권리금 시세 확인서가 필요해요. 수수료가 50만원입니다.” 권리금 시세 확인을 대행해 줄 테니 50만원을 내라고 했다. 자영업자 전용 스미싱이라고 할까. 망한 은퇴 자영업자 등치는 전문 직종까지 생겨난 셈이다. 억장이 두 번 무너져내렸다.
그래도 위안은 있다. 주변엔 나 같은 사람 천지다. 올해 망한 자영업자 중 절반이 50대다. 전체 자영업자 중 50대가 약 30%(200만 명)로 가장 많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8년 이후 크게 늘어나던 자영업자 창업은 올 들어 계속 줄었지만, 50대 창업만은 되레 매달 3만 명씩 늘었다고 한다. 은퇴 후 남는 8만 시간, 직장을 떠난 뒤에도 40년을 더 살아야 한다는 고령화의 공포가 주범이다.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시각각 조여오는 압박감. 이걸 누가 견디랴. 한국은행은 자영업 위기를 ‘폭탄’으로 정의했다. 자영업자의 빚 450조원 중 60조원은 부실 위험이 있다고 봤다. 빌린 돈 못 갚는 50대 때문에 나라가 큰일날 수 있다는 경고도 덧붙였다. 나라에도, 내게도 대책은 없어 보인다. 그나저나 내 이름 난달라, 이름부터 바꿔야겠다. ‘나도야’로.
- 이정재의 시시각각 논설위원·경제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