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골에 오다
서향으로 앉은 토담방 툇마루에서 보는 풍경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된다. 하늘 아래 산이 있고 그 산 아래 들이 누워있다. 들이 끝나는 곳에 작은 대숲이 있고 대숲과 맞대어 있는 담을 넘으면 우리 집 마당의 매실나무가 천 개의 팔을 가진 듯 이리저리 가지를 뻗은 채 튼실하게 서 있다. 가끔 들고양이가 대문 없는 마당으로 들어와서는 느릿한 걸음으로 텃밭을 향해 간다. 툇마루와 매실나무 사이에 넓은 마당이 있고 그 마당에는 일 년 동안 숱하게 오고 갔던 발자국들이 찍혀있다. 좁은 아파트에선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이사 온 시골 마당에서 다 만났다. 지금은 혼자 조용히 햇볕을 쬐고 있지만 금방이라도 지나가는 누군가가 내 안부를 물으며 마당으로 쑤욱 들어올 것만 같다. 나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나는 토담방 마루에 앉아서 고스란히 느낀다.
◆땅을 파면 숯이 많이 나온다는 숯골
남편과 나는 땅을 파면 숯이 많이 나와서 숯골이라 이름 지었다는 이 동네로 작년 삼월에 이사 왔다. 스무 가구가 살고 있는 숯골은 평균 나이가 50대 중반일 만큼 요즘 시골에선 흔치 않은 젊은 동네다. 자녀들은 대부분 직장이나 학교를 다니기 위해 외지에 나가 있고 부모들이 다양한 작물을 지으며 생활하는 활기찬 농촌마을이다. 남편은 몇 년 전부터 아파트 생활이 지긋지긋하다며 땅을 밟으며 살 수 있는 곳으로 이사 가자고 성화를 부렸다. 케이블 티비에서 방송되는 ‘자연인’의 모습은 남편의 갑갑증을 부채질했다. 움막을 짓고 살더라도 아파트보다는 낫겠다는 말을 하는 남편을 보며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하는 마음에 무턱대고 들어온 곳이 여기 숯골이다.
◆무턱대고 시작한 시골 생활
지난 일 년 동안의 시골생활이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시내와 오가는 길이 멀어 나는 하던 일을 놓아야 했다. 동네사람들에게 물어가며 지은 감자는 알을 맺지 못했고 잡풀이 점령한 텃밭엔 여름 내내 들어가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여름 뙤약볕은 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럼증을 일으키게 했고 갖가지 벌레들이 집안 곳곳을 함부로 돌아다녔다. 자신의 일과 텃밭 농사를 병행하는 남편은 다가올 겨울에 쓸 땔감용 나무를 구하기 위해 아는 사람의 과수원에서 종일 늙은 배나무를 베는 일을 마다 않는다. 나 역시 별 하는 일 없이 지내는데도 평생 없던 굳은살이 손바닥에 배어 속상하다. 시골에 살면 생활비가 훨씬 적게 들겠거니 했던 예상도 맞지 않았다. 채소는 사먹지 않았지만 그 값은 생활비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대신 주택관리비와 난방비는 도시보다 훨씬 더 많이 들어간다. 아파트의 경우 관리비만 내면 별다른 주거비용이 발생하지 않는 반면 여기서는 모든 문제를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시골이라 추가 출장비가 붙는다는 말도 이젠 익숙하다.
◆곳곳에 움직이는 생명들의 몸짓
좌충우돌의 모습으로 한 해를 보내고 다시 봄을 맞았다. 내 나이 50대 초반, 누구는 너무 일찍 시골로 들어갔다고 하고, 누구는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길을 왜 선택했느냐며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파트에서 살았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귀엽고 든든한 강아지 두 마리와, 마당 가득히 들어왔다 나가는 청량한 바람이 있어 살 만하다. 준비 없이 이사 온 탓에 제대로 보지 못한 것들이 일 년이 지난 지금 새롭게 보인다. 작년 이맘때도 마당엔 매화꽃이 활짝 피었을 텐데 그땐 내 눈이 그것을 담지 못했다. 2월부터 꽃망울이 붉어지기 시작한 매실나무가 지금은 꽃을 활짝 피워 전등을 켠 듯 마당이 환하다.
시골에선 꼭 사람이 아니어도 늘 함께하는 이들이 있다. 뒷마당 감나무에 앉아있는 참새와 까치, 까마귀, 이따금 하늘 위를 맴도는 매. 그리고 어느 구석 자리에든 터를 잡고 살아가는 생명들이 내는 숨소리가 곁에 있기에 우리 집은 늘 가득 차 있다. 오늘은 소나무 아래 움트고 있는 수선화가 봄맞이를 하기 위해 힘을 뻗는 소리를 듣는다. 아무것도 없을 것처럼 휑한 화단도 그 아래에선 생명들이 금방이라도 움틀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생명이 곳곳에 스며있는 이곳의 생활, 그 생명들이 이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천지 사방을 지나 내게로 오고 있기에 숯골에서 봄을 맞이하는 내 마음은 설렘으로 두근거린다.
- 배경애(귀촌 2년 차`시인)
그녀의 모습은 아주 가끔 아니고 자주 푼수다. 그녀의 여러 모습 중 내가 가장 끌리는 부분도 역시 이부분이다. 지인의 집들이에 갔다가 그 동네가 마음에 들어서 친구 따라 강남가듯 가게 되었다는 귀촌, 지난 3월 부터 그녀는 "한 1년 지나니 이제 주변이 눈에 들어와요!"라고 했다. 그녀의 좌충우돌 귀촌일기가 대구매일에서 연재 시작되었다.
어제도 독서토론 모임이 끝나고 등나무 아래서 마주 앉은 김에 " 갈수록 푼수로 보인다"고 했더니 그녀의 응수, "미애씨 첫인상도 비호감! 이었거든요?" 란다. 이런 어쩔까나. 첫인상이라면 한 4,5년 전이고 그날 저녁 내 기억속에는 그녀가 없는데.
그날은 지금은 나도 몸담고 있는 도립도서관 느티나무 독서회 출판기념회에 초대 받아서 간 자리였었다. 짐작이 될 듯 말듯하고 그날밤의 기분은 그대로 되살아났다. 나는 그날 밤 존함만 들어서 익히 잘 알고 있지만 얼굴은 한 번도 뵌적 없는 선생님을 만난다는 기대감이 느티나무 회원들을 만난다는 기대감보다 컸었다. 강당에 들어섰을때 행사가 진행되고 선생님의 강의가 한시간 남짓 있었는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고정관념을 깨라!"는 명강의 였다. 그때만 해도 나한데도 고정관념 탈피는 파격!이었다.
어쨌거나 자신도 조심스러워서 함부로 가까이 가지 못하는 스승님을 뵙는 자리에서 내가 먼저 악수를 청하는 모습이 건방져! 보였다는 것이다. ㅎㅎㅎ 지금도 그 순간을 기억한다. 처음 뵙는 자리고 반가워서 정말 넙죽 다가선 자리였었다. 근데 옆에서 보기에 '어디서 굴러온 뼉따귀야' 정도 였을지는 ㅎㅎ 생각 못했다.
각설하고, 어제 도서관 등나무 아래서 나눈 '푼수'를 그녀는 '비주얼'로 응수했다. 즉 비주얼만 괜찮은 여자라는 얘기를 만나기 전에 들었다는, ㅎㅎ 이 또한 외적인 것도 간과하기 싫은 나를 잘 읽어준 예리한 시인 같은 모습이다. 어쨌거나 우리가 한거풀 더 민낯을 보는 시간같았다. 시만 쓰는 그녀가 어떻게 풀어나갈지 앞으로의 숯골 이야기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