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 금기란 내 쪽에서 만들었다는 걸,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 기간 동안 보여준 행동을 통해서 깨닫게 됐다. 그는 한국인들에게 “왜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묻는 듯한 행보를 이어갔다. 비즈니스석과 작은 차와 숙소에 만족했으며, 퍼레이드 중에도 아이들을 보면 안아 들고 너무나 기쁜 듯이 입을 맞췄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정치인들에게 헌신짝처럼 버림받은 세월호 유가족들을 향해 교황은 먼저 손을 내밀어 그들을 위로했다.
그 모습에 올 한 해 매정한 한국 사회를 향해 빗장을 걸어 잠근 내 마음으로도 조금씩 빛이 스며들면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우리 인생은 걷는 일입니다. 발걸음을 멈추면 일이 안 됩니다. 늘 걸어야 합니다’라든가 ‘젊은이들이여, 잘 들으시오! 시류에 거슬러 가시오!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혹은 ‘기쁨! 절대로 슬픈 남자, 슬픈 여자가 되지 마십시오’ 같은 말들. 교황을 가까이에서 뵙기 전이었다면, 위로조차 안 되는 흔한 말들이라고 여겼을 그 말들이 새롭게 들렸다.
교황의 말이 가장 환하게 빛난 건 16일 오전, 윤지충을 비롯한 124위의 순교자를 복자로 모시는 시복 미사 때였다. 그가 마침내 “법으로 정한 장소와 방식에 따라 해마다 5월 29일에 그분들의 축일을 거행할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라고 선언하자, 광장에 모인 신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순간 광화문은 역사란 강물과도 같아서 아무리 힘든 여정이라도 끝내 바다에 이르고 만다는 교훈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을 것이다.
윤지충·정약종·강완숙 등 복자들 중 다수는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 때 순교한 분들이다. 이 일의 여파로 유배를 가게 된 정약용이 강진에서 『여유당전서』 500권을 쓴 일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정약용은 왜 그토록 읽고 써야만 했을까? 유배지에서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자신들의 집안은 폐족이 되었으니 이제 살 길은 오직 독서뿐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살기 위해서 그는 읽고 쓴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살아남아야만 했던 이유는 신유년에 일어난 일들의 진상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18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북한강변 마현 본가로 살아 돌아온 정약용은 1822년 신유박해로 억울하게 죽은 권철신과 이가환의 묘지명을 새로 쓰면서 정조대왕이 갑자기 돌아가신 1800년 여름에 ‘물이 스미고 불이 타오르듯’ 천주교가 서울 여항에 퍼져나갔다고 썼다. 이 묘지명에 “정권 잡은 사람들이 무얼 알았겠는가. 평소에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만 익히 알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죽였을 뿐이다”라고 써서 정약용은 권력에 눈이 먼 무리들이 반대세력을 천주교인으로 몰아서 잔혹하게 배척했음을 끝내 밝히고야 말았다.
광화문은 그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봤으리라. 사람을 역적으로 몰아 도막 내어 죽여도 찍소리 못하는 무정한 세월이 흘러갔다. 그 무정한 세월을 무정하다고 몇 줄이나마 쓸 수 있게 되기까지 21년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런 아우 정약용으로서도 형 정약종에 대해서는 “우리 형제 세 사람이 모두 기괴한 화란에 걸려들어 한 사람은 죽고”라고밖에 쓸 수 없었다. 그러니 자신의 믿음 때문에 죽어간 자들이 결국에는 옳았음을 밝히는 데엔 20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200년은 긴 시간일까, 짧은 시간일까? 역사의 눈으로는 짧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너무나 길다. 우리는 그만큼 살지 못한다. 그렇기에 “해마다 5월 29일에 그분들의 축일을 거행할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라는 교황의 선언은 믿기 어려운 복음처럼 들렸다. 오늘도 광화문에서는 죽음의 진상을 밝혀달라며 세월호 유가족이 30여 일 넘게 목숨을 건 단식 중이다. 교황의 말이 복음처럼 들렸다면, 이제 그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때다.
김연수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