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하는 사회
연산군과 정조는 어린 시절에 부모가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겪었지만, 즉위 후 대조적인 평가를 받는 국왕들이다. 정조가 자기단련으로 시련을 극복한 반면, 연산군은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무오·갑자사화를 거치며 신진사림과 훈구공신들을 제거한 연산군은 조선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인물이다. 철권통치로 왕권확립에 몰두한 태종보다 가혹했다.
그러나 이는 역으로 연산군이 그만큼 철저하게 고립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머니인 윤씨의 폐위와 죽음이 후궁의 참소 때문이란 사실을 들은 연산군은 두 여인을 그 날로 때려죽였다. 윤씨 폐위와 죽음에 관련된 모든 이들이 끔찍하게 죽어나갔다. 이후 연산군은 광기(狂氣)와 증오에 찬 망나니에 불과했다. 신하들의 비판을 무조건 분노로 받아쳤다. 관례와 규율을 무시하고 즉흥적·충동적으로 행동했다.
정조 이산은 11세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었다. 반대세력에 둘러싸여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즉위 후에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고통에 당당히 맞섬으로써 내면의 상처를 치유했다. 자신에게 맞선 대신들을 냉정하고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표정에 감정을 싣지 않았다. 목표를 세우면 치밀하게 밀고 나갔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했다면 그는 왕위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금 시각으로 분석하면 연산군은 충동조절장애를 겪었음에 틀림없다. 아버지 성종은 ‘낮에는 요순(堯舜), 밤에는 걸주(桀紂)’라 불린 호색가였다. 중전 윤씨의 투기에 ‘욱한’ 성종이 폐위와 사약으로 앙갚음했다. 며느리가 탐탁잖은 인수대비의 분노가 성종에 미쳤고, 성종의 분노는 고스란히 아들 연산군에 이어졌다.
요즘 우리사회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욱하는 사회’가 된 듯하다. 결별을 요구한다고 여자 친구를 승용차로 들이받고, 계약금 문제로 다투다 분신하고, 주차를 제대로 하라는 행인을 두들겨 패고…. 욱해서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기파괴와 고립감을 키우고, 주변을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박경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