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칼럼] 성완종 사태와 한국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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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처음 한 말인지 모르지만, 정치를 놓고 개인적으로 늘 상기하는 문구가 있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없으면 생기지도 않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별로 틀린 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치가 국가와 사회 경제의 현안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 스스로 저질러 놓은 일로 다투고, 갈등하고, 종국에는 파국을 맞은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최고 집합체인 국회가 그렇다. 생산적인 현안, 예를 들면 민생 법안, 노사문제, 경제정책, 공무원 연금, 대북정책과 같은 이슈를 놓고 오랜만에 건전한 논쟁을 벌이는 듯하다가도 느닷없이 생겨난 ‘자신들의 정치적 일’에 매몰되는 경우를 우리는 숱하게 봐왔다.
쉽게 말해 정치가 경제 사회의 문제를 품고 리드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정치 그 자체를 위해 ‘시시포스의 신화’처럼 끝없는 소모적 뒤치다꺼리를 일삼는다는 것이다.
작금의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자살과, 이어진 ‘성완종 리스트 파문’도 마찬가지다.
병역 기피 의혹을 완전히 해소하지도 못한 채, 국회에서 단 7표 차이로 총리 자리에 오른 이완구 국무총리가 지난달 12일 취임 일성으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부정부패를 발본색원하겠다’며 대(對)국민담화를 발표할 때만 해도 이 사건이 ‘정치의 정치에 의한 전대미문의 정치적 스캔들’로 비화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물론 그 순수성에는 일말의 정치적 의심이 있었다. 이 총리는 사정 정국을 예고하며, 해외자원개발 부실투자 논란 등 구체적 목록을 적시했다. 세간에는 전 정권의 비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치적 색채가 강했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물이 중력을 찾아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 부정부패를 일거에 해소하겠다는 의욕에서 출발한 수사의 칼날은 돌고 돌아 결국 정치권으로 꼽혔다. 스스로 부패와의 전쟁을 공언한 국무총리에게부터 칼을 겨눴다.
기업인 성완종 전 회장은 정치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스스로 오염됐다. 정치인이 정치인을 상대로 돈을 뿌리고 받았다. 구속 위기에 몰린 그가 자살과 함께 세상에 던져버린 ‘원한의 메모와 녹취록’에는 국무총리와 함께 전·현직 청와대 비서실장 3명까지 이름을 올렸다. 이 이상 나라가 시끄러워질 수도 없게 됐다.
그래서 검사 출신으로 ‘성완종 리스트’에 오른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성 전 회장의 자살과 리스트가 공개되기도 전인 지난달 이미 ‘수사를 제대로 못하면 역풍을 맞을 것’이라고 예언한 대목은 어쩌면 우리 정치의 오랜 생리, ‘보복과 앙금의 정치’를 간파한 데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부터는 과거에도 늘 그랬듯이 ‘자신들이 없으면(돈을 주고받지 않았으면) 있지도 않을 일’의 후폭풍이 한동안 진행될 것이다.
‘총리에 이어 현 정권 몸통 비리인 친박(親朴) 실세들은 국민 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 ‘과거 노무현 정권에서 성완종을 두 번 사면(赦免)한 것이 원죄다’라는 논쟁이 이어질 것이다. 검찰의 수사가 성이 차지 않는다며 숱하게 들어왔던 특검을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또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할지 모른다. 새 총리 인선을 놓고 총리 청문회가 이어지면 정파적 이해에 따라 물고 늘어지면서 청문회가 누더기가 될 것이다.
그사이 이미 공무원 연금개혁을 비롯한 민생 법안들은 물러 터져 뒤로 미뤄지고, 언젠가 막판에 무더기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난 후 우리는 과연 지금 생산적인 일을 정치가 하고 있느냐고 늘 그래왔듯이 또 반문하고, 그러고는 버릇처럼 잊어버릴 것이다.
한국 정치를 굳이 낮춰 볼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스스로 없었다면 생기지도 않을 일’을 만들어서 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그 버릇을 버릴 수가 없다면 다소 줄이기라도 해줬으면 한다
-편집국 부국장 겸 정치·경제부문 에디터
영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