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사

'불편한 진실' 앞에서

구름뜰 2015. 6. 25. 09:01

(노트북을 열며) 기억에 관하여

 

 

 

 

안혜리
중앙SUNDAY 기획에디터

 

 

 

벌써 20년도 더 된 얘기다. 새벽에 술집 아가씨 여럿이 목숨을 잃은 화재 현장 취재를 갔다가 들것에 실려 나오는 시체를 본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십수 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당시 같이 일했던 선배가 밥 먹는 자리에서 웃자고 그 시절 얘기를 꺼냈다. “사건 처리하던 경찰이 너를 술집 아가씨로 알아가지고….”

 정말 의아했다. 그런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수습기자 시절 청바지에 티셔츠 하나 입고 모 기관에 취재 갔다가 신문사 보급소에서 나왔느냐는 얘기를 들었던 건 또렷이 기억한다. 황당했으니까. 하물며 취재 현장에서 경찰로부터 접대부로 오인받는 불쾌한 경험을 했다면 그걸 기억 못할 리가 없다. “에이, 무슨 그런 농담을.” 하지만 그 선배는 완강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데.”

 사실 여부를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더 이상 진도 나가지 않고 그쯤에서 멈췄다. 하지만 똑같은 사건, 심지어 나 자신과 관련한 기억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걸 직접 경험하고는 ‘기억’이라는 걸 확신하거나 과신하지 않는다.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말이다.

 어린 시절 TV에서 잉그리드 버그먼 주연의 스릴러 영화 ‘가스등’(1944년)을 본 이후 진작부터 사람의 기억이 얼마나 취약한지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상속녀인 아내를 정신병자로 만들려는 남편이 집 안 물건을 하나씩 숨겨놓고는, 아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거라고 아내의 기억을 조작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이렇게 장황하게 기억에 얽힌 사연을 끄집어내는 건 최근 표절 시비에 휘말린 작가 신경숙이 한 신문 인터뷰 때문이다. “아무리 기억을 뒤적여봐도 (표절했다는 작품을) 안 읽은 것 같은데, 지금은 내 기억을 믿지 못하겠다. …대조해 보는 순간 나도 그걸 믿을 수가 없었다.”

 표절을 아예 부인하던 입장을 바꿔 표절을 시인하고 사과했는데도 이런 표현이 알려지면서 비난 여론이 잠잠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거세지는 모양새다. 인터뷰 형식을 빌려 사실상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이런 언급을 한 게 과연 적절했는가, 라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하겠다. 하지만 들끓는 여론처럼 그가 말도 안 되는 유체이탈 화법으로 정직하지 못한 변명, 즉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는 비난엔 섣불리 동의하지 못하겠다.

 몇 년 전 미 노스웨스턴대 연구팀은 ‘뇌가 과거 기억을 편집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뇌과학자인 김대식 KAIST 교수는 칼럼에서 이를 소개하며 “기억은 비디오테이프나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아니다”며 “기억은 항상 업데이트되고 현재의 변화가 클수록 과거는 더 많이 편집된다”고 했다.

 누구는 이쯤에서 “신경숙을 옹호하려는 궤변이냐”고 따져 물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거꾸로 기억이라는 게 이처럼 내 맘대로 온전하게 저장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가 처음부터 겸손하게 자신을 내려놨으면 좋았겠다는 얘기를 하려는 거다. 그리고 우리 모두 엉뚱한 기억의 제물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취재일기] 독자들은 아직도 ‘표절의 진실’을 원한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신준봉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지난 16일 소설가 이응준씨의 문제 제기로 시작된 소설가 신경숙씨의 일본 소설 표절 논란이 한 고비를 넘은 듯하다. 열흘이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문학 독자들은, 아니 한국 사회는 참 많은 걸 보고 듣고 느꼈다. 우선 수많은 말들의 ‘향연’이 있었다. 후세에 기록으로 남긴다면 역시 1위 후보는 신씨다. 그는 23일자 언론 인터뷰에서 “표절이라는 문제 제기를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읽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제는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같은 석연치 않은 해명으로 또 한번 공분을 샀다.

 격동의 1970∼80년대를 헤치며 민주화 운동의 한 축으로 우리 사회의 양심적인 목소리를 자처해온 출판사 창비의 처지도 딱하게 됐다. 위기대처 능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되었나 하는 건 둘째 치고, 책 많이 팔아주는 스타작가에게 휘둘리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저 좋은 문학작품을 찾아 읽기만 하던 독자들이 ‘문학권력’이 판치는 문단의 어두운 현실에 대한 견문을 넓힌 것이 이번 표절 논란의 소득이라면 소득일까.

 불똥은 동료 작가들에게도 튀었다. 한 중진 소설가가 24일 낮술을 마시다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장편소설을 쓰다 마음이 답답해서 술 한잔 마셨다”고 했다. 사람들이 멀쩡한 작가까지 색안경 끼고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됐다는 얘기였다.

 좋은 소설은 우선 잘 읽혀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재미를 추구하는 엔터테인먼트 성격의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문학성’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을 갖춰야 좋은 소설의 범주에 들 것이다.

 이번 파문 덕에 소설의 상업성과 문학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지금까지 신씨 소설이 두 가지 모두를 갖춘 대표주자 격이었기 때문이다. 문학성이란 무엇일까. 진부한 표현이지만 인간과 세상에 대한 어떤 진실을 담고 있어야 문학성 있는 작품일 것이다. 우리가 신씨 소설에서 단순한 재미를 넘어 감동까지 느꼈던 건 작가가 자신의 양심을 걸고 세상과 싸운 정직한 상처의 흔적에서 어떤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표절은 그런 신뢰를 깨트리는 행위다. 그에 대한 진실을 얼버무리는 듯한 신씨의 태도는 실망감을 더 키웠다. 그런 점에서 신씨의 해명은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힘들겠지만 다시 한번 공개석상에서 충분히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해야 한다. 우리는 잘 읽히고 감동적인 신경숙 소설을 잃고 싶지 않다.

 

* 오늘자 중앙일보 오피니언란 30면과 29면에 실린 두사람의 글이다.  

쓰는 사람으로서 신경숙의 입장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두사람 글이 다 공감간다. 처음

이응준씨가 표절문제 제기를 했을 때 용기에 박수는 보내고 싶었다. 그에 반해 신경숙의 무대응!은 애독자의 한사람으로서 실망스러웠다. 세간의 비난이나 질타를 유발시킬수 밖에 없는 대응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런 대응이 이번일을 잦아들게 만들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좀더 심사숙고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동안에 업적!들이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지금의 사태가 안타깝다.

 

 또 다른 면에서보면 그래도 문학계는 진실이 담보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 아무리 기억을 뒤적여봐도 (표절했다는 작품을) 안 읽은 것 같은데, 지금은 내 기억을 믿지 못하겠다. …대조해 보는 순간 나도 그걸 믿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 진실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의 말처럼 기억이 편집되고 편집되어서 이것이 진실일 수도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곡인 비틀즈의 '예스터데이'도 작곡을 끝낸 뒤 너무도 편하고 익숙한 멜로디라서 비슷한 리듬이 있는거 아닌가 싶어서 발표를 미뤘다는 일화를 접한적이 있다.  SNS 시대다. 유명세가 고지라면 그 만큼 추락위험도 높다. 사생활에 가까운 일상의 행동들이 세간에 알려지고 한 순간에 패가망신을 당하하는 사례도 허다하다.  

 

 

공지영의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부르주아의 부인들이 교회에 와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심지어 때로는 거리로 나서서 그 고운 손으로 몸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나누어 주지만 그들은 자신의 남편들의 공장에서 일어나는 부당한 해고와 인격 말살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각이 없지. 그러고도 스스로 예수의 제자라 믿으며 미사에 참석하고 거기서 어떤 죄책감도 얻어가지 못해. 이게 우리의 현실이야. 그 현실의 가장 큰 옹호체가 교구와 수도원! 주교와 장상들!

 

과연 예수가 다시 온다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까? 내 생각에 예수가 다시 온다면 그들이 가장 먼서 나서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버릴 거야.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지하게 감금하겠지. 아니다. 현대에서는 그런 방법이 아니다. 그건 비난받을 확률이 너무도 높아, 제일 좋은 건 미디어를 이용해 그를 바보로 만드는 거야.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트집 잡아 기사를 내겠지. 그가 한 집에 초대되어 갔는데 젊은 여자 막달라 마리아를 동반해 물의를 빚었다. 심지어 그녀는 사치스럽게도 200만 원짜리 향유를 그의 발에 부었다. 평소 그들은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이에게 주라고 해놓고 말이다"

 

소설이지만, 우리 삶은 이런 불편한 진실들 앞에서 자유롭지 않다.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모든 이들은 살아가고 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얽힌 인과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불편한 진실'이 그나마 문학계여서 정치계나 다른 어떤 쪽보다 그래도 진심으로 읽힌다. 이것조차도 고정관념!인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