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구!
내가 땡구를 처음 본 것은 동네 저수지 산책길에서였다. 지인은 몸이 좋지 않아 업고 나온 거라고 했다. 친정어머니 돌아가시고 우울증 올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큰아들 권유로 키우게 되었고 2살때 왔으며 11년을 함께했다고 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개와 인간 사이의 사랑보다 열등하게 창조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조물주가 계획한 것은 아닐것' 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 베풀기만 하는 자발적인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기대하지 않는 사랑에 대한 얘기다.
초등학고 4학년 때 우리집에도 개가 있었다. 학교 다녀오면 엄마보다 날 반겨주던 녀석이 무조건 좋았었다. 그렇게 한달 남짓 지났을까. 어느날 내가 왔는데도 보이지 않았고 엄마는 죽었다고 했다. '죽음'이라는 것, 마음을 준 대상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가슴한쪽을 후벼낸것 같은 아픔이란걸 그때 처음 알았다. 이럴거면 우리집에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 함께한 시간은 짧았어도 오래도록 아픈기억으로 남았고 그 때문인지 아직도 반려견 생각은 못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는 대상에게 사랑받고 싶은 감정이 자동으로 따른다.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바꾸려하지 않는 숭고한 사랑은 어렵다. 내 맘같기를 바라며 기대에 어긋나는 대상 때문에 수시로 내 감정이 달라지지기도 한다. 당신과 상관없이 나만 사랑하리라는 마음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랑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과의 문제다. 어찌보면 사랑은 갈등(서로가 원하는 형으로 바뀌길 바라는)이라는 뿌리를 가지고 커가는 것일게다.
지인은 남편이 출장가 있는 시간에는 땡구가 자신을 지켜주려 잠도 자지 않은것 같다고 했다. 설마 그렇기야 할까만, 출근할 때 차례로 배웅하고, 퇴근길 '차가 들어왔습니다'라는 인터폰이 울리면 현관으로 달려가 목빼고 기다리기 때문에 바로 올라오지 못할 때는 아파트 밖에 주차하고 볼일을 본다고 했다.
상대가 분명히 그럴것이라는 신뢰, 그 신뢰가 반복된 확신은 행복의 밑바탕이 되는지도 모른다. 운동도 함께 가겠다고 떼쓰는 덕분에 부부간에 격조한 시간도 함께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는 지인, 땡구를 시작으로 주변에 반려견 키우는 분들도 늘어났다고 한다.
오월 말에 지인은 은퇴를 했다. 땡구를 두고 출근하면서 어느때는 티브이를 켜놓고 나갔다가 점심시간에 돌아오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내일 죽어도 여한 없도록 오늘을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는 그녀. 저수지 연꽃이 활짝핀 걸 보려면 오전에 가야한다는 걸 땡구덕분에 알게되었다는 그녀의 미소를 보면서, 땡구는 말로는 다 못할, 가슴으로 느끼는 존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