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김혜순

구름뜰 2017. 4. 22. 07:19

 


솔직한 시여!


학생들이 이 시 참 좋습니다. 라고 하면, 왜 좋으냐고 물어볼 때가 있다

학생이 대답한다

시인이 솔직합니다. 자기 경험을 말합니다.

그러면 않아는 학생에게 되묻는다.

그 시인이 솔직하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

남의 경험을 꾸며 자기 경험처럼 정렬한 것은 아닌지

시보다는 수기를 쓰는 게 낫지 않은지

자서전, 전기, 역사 중에 가장 허황된 장르는 무엇인지

(않아는 자신의 인생을 재료로 자서전을 쓰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자서전에 쓰인 내용은 그의 실재일까, 아니면 그의 소망일까?)

시에서나 자서전에 '나는 솔직하다'는 위선을 머플러처럼 두르고, 시적 자아를 조작한 것은 아닐까?

(어떻게 그 많은 고백을 갈무리해 서사를 꾸며낼 수 있단 말인가? )

않아는 자꾸만 물어본다.

우리는 묻고 대답하면서 '시'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


문학은 본래적으로 솔직하지 않다

시는 언어의 관습적인 사용에 대한 거짓말이며

소설은 현실의 관습적인 사용에 대한 거짓말이다.


어쩌면 작가는 우리가 사라지면 거짓말만 남으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시는 시적 화자가 일상적 자아와 한몸임을 잊을 때

그 일상적 자아의 내장을 베어 냄새를 흩뿌릴 때

(마치 몽골의 유목민 아내가 양을 잡은 다음 대장에 남은 똥을 나뭇가지 곁에 흩뿌릴 때처럼)


구축된 건축물이 말(언어) 아래에서 올라올 때 그러나 구축이 곧 파괴일 때

그 건축물이 세계를 품을 때.


여기가 아닌 곳을 향해 한쪽 팔을 뻗칠 때.

여기가 아닌 곳에 닿은 한쪽 팔이 기형으로 오그라들 때

그것을 시라고 불러봐야 하지 않을까.


솔직하기보다는 시인의 감수성이 저 광활한 우주와 만날 때.

인생이 연결 고리에 주르르 꿰어지지 않을 때

정신박약아들의 숙소를 방문하고 나왔을 때처럼 개인의 일상적 경험에서 의미가 증발해버렸다고 느껴졌을 때

개를 끌고 길거리에 무료히 앉은 아이가 세상 전부를 봐버린 그순간, 그 막막한 느낌처럼.


도대체 우리의 일상적 자아도 아닌 시적 자아가 무엇을 솔직하고, 무엇이 솔직하지 않은지 어떻게 편가를 수 있단 말인가.


시를 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을 바퀴살 가운데에 둔 것처럼 망각의 기계를 전속력으로 돌려보는 행위다. 실용적인 잣대로 판단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의 재료를 삼을 수도 없는 부재룰 생산하는 행위다.

-김혜순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문학동에 2016 중에서



 

시 창작 워크숍


시 쓰기를 가를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러면 않아는 대답한다

가르친다기보다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것과 혼자 생각해보야 할 것이 있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않아는 더불어 생각해봐야 할 것을 서로서로 나눕니다. 라고 대답한다.

또 갑자기 정색하고 '시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시를 철학적 전개에 종속시키는 것이라 여겨지는 경우, 그 질문 자체의 불가능성을 거론할 수 있겠다.)
그러면 않아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오백 가지가 있고, 그 오백 가지를 시간과 장소, 기본 듣는 사람, 날씨 등등의 경우의 수에 적용한 만큼 대답이 많이 나올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교과서적이거나 보편적인 정의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시 한편에 따라 다른 대답이 나올 수 있다. 어떤 대답도 맞고, 또 모두 틀린 것이 시에 대한 정의다. 시에는 어떤 진리도 통용되고, 또 어떤 진리도 통용될 수 없다. 이런 때 시는 가르치고 배울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세상에 나온 시만큼, 세상에 나올 시 만큼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있을 수 있다. 시에 대한 정의는 끊임없이 개별적으로 내려지지만, 영원히 시라는 원대한 공화국을 벗어날 수 없는 옥시모론으로만 대답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우리 각자가 다른 사주를 갖고 태어나 그 탄생 연월일시의 우주를 간직하고 살아나가듯이, 태어난 시각에 시작된 우주의 운행을 자신의 운명이라 여기듯이. 시 비평 혹은 시 수업은 각각의 시에 다르게 적용되는 우주 혹은 쓴 사람의 실존을 나눈다.

그래서 어젠 시는 영감의 소산이라고 했다가 오늘은  영감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기에 어디에 숨어 있다가 온다는 말이냐, 라고 질문을 되돌려버릴 수도 있다.

그리하여 시는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라기 보다 매시간 다른 시를 앞에 놓고 매번 다른 정의를 내려보는 거다. 시 한편 한편의 체험적 단독성, 개별성을 널리 선포해보는 것다. 그리하여 매번 광대한 시적 고독에 이르는 거다.

-김혜순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문학동네 2016 중에서


* 옥시모론(oxymoron)

모순어법 (귀를 먹먹하게 하는 침묵)와 같은 같이 의미상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말을 함께 사용하는 수사법 (상반되는 것이 같이 존재하는 예를 들어서 날카로우면서도 둔하다 같은...)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는 시집만 내던 김혜순 시인이 작년에 낸 책이다.

시집 같기도 하고 산문같기도 한, 시산문처럼 풀어쓴 것 같은 책이다.

시 창작에 관심있는 이들이 읽기에 좋은 책이다.

아니 김혜순의 시를 읽고 싶다면 이 책을 먼저 읽어 봐도 좋겠다.


또 문예창작과 관현한 사람들에게 텍스트가 될 것 같다.




이 책속 '않아'는

작가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고독존자 권태존자'라는 제목으로 문학동네 카페에 8개월동안 연재한 글이라고 한다.

 않아는 작가의 인식. 즉 아바타 같다고 보면 되겠다.

분량이 많고, 잘 안 읽힌다. 

번 정도 보면 열편에 한 편 정도 읽힌다. 

그래서 자괴감 든다


않아의 사유를 지푸라기처럼 잡고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뚝 끊어지고 내 손에 남은 몇가닥 지푸라기만 보는 일이란..


그래서 책을 덮게도 된다.

그래도 또 다시 펴면 띄엄띄엄 읽힌다

어떤 페이지는 까만건 글씨다


시를 지도해 주는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 김혜순 시을 다 따라갈 수는 없고요!

그래서 위로가 되기도 했지만

자괴감 드는 위로였다.

 '않아'라는 화자도 편해진다.

읽다보면...


너무 좋은 글이 많지만 시에 대한 원초적인

이 두 편의 글이 좋았다. 





김혜순은'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책 마지막말(p389)에서 이 책에 대해서 이렇게  풀어 놓았다. 


이것을 시라고 하면 시가 화냅니다. 이것을 산문이라고 하면 산문이 화냅니다. 시는 이것보다 높이 올라가고 산문은 이 글들보다 낮게 퍼집니다. 이것은 마이너스 시, 마이너스 산문입니다. 이것을 미시미산 이라고 부를 순 없을까. 시산문이라고 부를 순 없을까. 시에 미안하고 산문에 미안하니까. 이것들을 읊조리는 산문이라고, 중얼거리는 시라고 부를 순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나는 시로 쓸 수 있는 것과 산문으로 쓸 수 있는 것이 다르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그 두 장르에 다 걸쳐지는 사이의 장르를 발명해보고 싶었습니다. 이 글은 나를 관찰하면 할수록 불안이 깊어지는 사람이 쓴 글입니다. 권태와 고독이 의인화된 사람이 된 그 사람이 쓴글입니다. 그 사람을 나라고 불러본 사람이 쓴 글입니다. 이 글들을 장르 명칭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멀리 존재하는 미지의 날, 애록(한국 KOREA를 거꾸로 쓰면 애록( AEROK)이 된다)에서 가장 멀리 있는 별자리, 생각만 해도 현기증나는 그 멀고먼 나라, 시의 나라를 그리워하면서 쓴 글입니다. 


시 같은 것도 있고. 산문시 같은 것도 있고 단상같은것도 있습니다. 소설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는 김수영의 말, 산문을 쓸 때도 자신은 시인이라는 보들레르의 말 사이의 길항을 붙들고 쓴 글입니다. 쓰는 동안에 거룩함이라는 쾌락, 연민이라는 자락, 건전함이라는 기만에 만은 빠지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2016년 3월 김혜순




사랑하는 두 행성처럼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선망하지 않아도 아름답다

높은 산 위에 노승과 공자승처럼.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멀리 볼 줄 아는네가 아름답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해질녘 저 멀리 산 위에 서 있는 두 사람의 검푸른 실루엣, 다투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멀리 보므로 아름답다.

눈을 가까이 대고 봐서 아름다운 것은 별로 없다.

오목거울을 대고 보면 모공에 사는 미생물을 일별했을 때처럼 징그러울 때가 많다.

가까이 있는 것이 아름다울 때가 있는데. 그때는 물론 사랑할 때다

사랑이 번지고 있을 때다. 아직 너라는 텍스트를 다 읽어내지 못했을 때다.

사랑은 아마도 가까이 있는 것을 멀리 있는 것처럼 보는 것인가보다.

너와 나를 행성처럼 멀리 떨어뜨리는 건가보다.

멀리 두고 바라보게 하는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인가보다

멀리 본다는 것은 어쩌면 '나'의 '죽음'이라는 '나의 소멸'을 전제로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너에게 가서 '내'가 죽어주겠다고 당연히 파멸할지도 모르는 것.


머나먼 것이 번져올 때, 아름답다.

머나먼 곳에 봄이 정박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겨울밤처럼 향기롭다.


멀리 있는 것은 작다. 작아서 안타까운 것, 심지어 보이지 않는 것. 그래서 아름다운 것. 가까이 있으면서 먼 것, 시끄러운면서 조용한 것. 다정하면서 매몰찬 것,  사랑의 원근법.




옥시모론..

이 시의 마지막 문장은 옥시모론이 제대로 쓰였다

사랑이 속성이 시와 닮았다는 생각이 문득.

그리고

일별해버린 미생물처럼, 일별해버린 어떤 마음 때문에

아니 본것만 못한 일도 있다. 

일별해버린 어떤 마음이 사랑이 되기도 하고..


멀리 있어서 아름다운 것과

멀리볼 줄 알아서 아름다운 것이 동격일리 없지만

먼것이 주는 가치는 동일하다.

 가까이 있어도 멀리 보는 게 좋고

가까이 있어도 멀리 볼 줄 아는 게 좋다는 말 같다.

결국 사랑하는 두 사람은....  

가까우면서 멀고, 시끄러우면서 조용하고, 다정하면서 매몰차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