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 ㅡ이규리
<현대문학 프롬나드–영화, 2008.2월호>
불편한 진실, 진실한 허구
비즐러의 눈빛이 기록하는 -『타인의 삶』
이 규 리
사람이 살아가는 일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먹고 자고 사랑하고 배설하는 일이다. 어느 날 누군가가 그런 기본적인 행위들을 훔쳐보고 있다면 어떠할까. 참으로 슬픈 일은 그것을 아는 순간에도 우리는 먹고 자고 사랑하고 배설하는 일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모른다 하더라도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본능은 인간에게 고통인 동시에 쓸쓸한 한계이기도 하다. 훔쳐본다는 건 인간의 내재된 본능이며 비교의 욕구와 상대에 대한 관심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그것이 쾌락과 연계하여 관음증을 부른다. 지금 누군가가 당신을 도청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금 당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를 주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나를,
흔히 이데올로기는 맹목이라고 말한다. 이데올로기가 맹목이라면 맹목을 다스리는 힘은 무엇일까. 영화 『타인의 삶』은 그것에 대한 해답을 천천히 제시해 준다. 이 영화는 1984년 통독 직전, 동․서독의 긴장이 고조되던 때, 시인이자 극작가인 드라이만(세바스티안 코치)과 그의 애인인 연극배우 크리스타(마티나 게텍)를 감시하는 동베를린의 국가안보국 산하 한 감시요원의 이야기이다. 감시요원이자 비밀경찰인 비즐러(율리쉬 뮤흐)는 ‘국가의 보안과 안녕’을 위하여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도청한다. 그에게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동독 최고의 극작가 드라이만과 아름다운 배우 크리스타를 감시하는 중대임무가 고통이기만 했을까.
어디나 권력의 힘을 내두르는 파렴치한은 있기 마련이다. 시인이나 극작가들은 권력을 우습게 보기 때문에 권력은 그들에게 더 가혹하다. 기름기 번질거리는 문화부 장관이 드라이만의 안위를 미끼로 크리스타를 유인하는 장면과 자동차 안에서의 섹스신은 진부하다. 그러나 이런 진부한 것들이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이미 우리들 삶 자체가 진부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어쩌랴 그것이 또한 삶의 리얼리티인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비즐러는 점점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인간적인 삶에 마음이 기울게 된다. 그리고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세상으로 한 걸음씩 걸어 들어온다. 영화가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웃지 않고 한 인간의 서사를 표현하는 비즐러의 눈빛 연기는 압권이다. 그의 심리에 변화가 생길 때면 어김없이 카메라는 그 눈빛을 롱 테이크 하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하고 있다. 어느 날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집에 몰래 들어가 노란색 브레히트 시집을 가져와서 읽는다.
9월 파란색 달이 뜬 바로 그날 어린 자두나무 아래서 고요히
난 그곳에서 창백한 내 사랑, 그녀를 품안에 안았다 좋은 꿈에서처럼
우리들 위에는 아름다운 여름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한 무리의 구름을 보았을 때…… 그 구름 무리는 매우 희였고 무척이나 높이 있었다
그리고 구름에서 눈을 떼었을 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비밀경찰인 감시요원이 시집을 읽는다는 발상은 그 설정이 다분히 낭만적이지만, 사람을 움직이는 건 이렇게 번한 일상사 가운데 있다. 비즐러가 시를 읽고 있을 때 그의 심경의 변화를 그리기 위해 카메라는 얼굴 위로 부드러운 햇살을 일렁이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상관인 햄프 장관과 그루비츠 대령의 날카로운 감시아래 자신의 임무에서 자유롭지 않다. 존재들의 관계는 연쇄적이며 그 고리는 혹독하다. 영화는 개인의 정서가 부재하는 직선적 삶을 더욱 리얼하게 보여준다. 절박함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게 있다면 삶의 밑바닥을 치면서 극한을 보는 눈을 주는 일일 것이다. 말하자면 한 치 앞을 디딜 수 없는 상황들 속에서도 인간은 변화할 수 있는 존재이다.
누군가라면,
죽음이란 역시 사건에 힘을 몰고 오는 요소임이 분명하다. 드라이만은 존경하던 선배 극작가 예르스카의 자살소식을 듣는다. 체제의 한계 속에서 자살한 예술가들, 그들은 피 흘리지 않는, 열정이 없는 삶을 참지 못하는 자들이다. 드라이만은 평소 자살만이 최선이며 죽음만이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이라던 예르스카의 절망을 기억한다. 슬픔에 겨운 드라이만이 예르스카가 생일선물로 준 악보, 『선한 사람들의 소나타』를 펴놓고 한동안 피아노를 치다가 크리스타에게 건네는 한 마디 말을 비즐러가 도청하게 된다.
이 음악을 들었던 누군가라면,
진정으로 들었던 누군가라면,
더 이상 나쁜 사람으로 머물 수 있을까
이 영화에는 눈물이 없다. 냉혹한 비즐러가 피아노를 들으며 처음으로 흘리는 한 줄기 눈물을 카메라는 놓치지 않는다. 피아노 소리와 그의 갈등하는 눈빛 사이에 고도의 수사법이 숨어 있다. 비즐러가 기거하는 마루바닥엔 감시해야 할 아래층과 똑같은 평면도가 그려져 있는데 그건 드라이만의 삶과 연계하는 압축된 장치이다. 도청하던 비즐러의 상체가 45도 기울어진 채 골똘하던 모습을 기억하는가.
몸의 각도가 45도 기울어져 있다는 건 그의 사상이 기울어지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 최상의 은유이다. 이런 경우 행위가 언어 이상이라는 말을 믿는다. 맹목을 다스리는 힘이나 이데올로기를 움직이는 힘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시 한 구절이나 노래 한 소절일수 있다는 것. 이때부터 비즐러의 삶에 조용하지만 강렬한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그는 드라이만의 위법적인 내용들을 고쳐서 기록하고 보고하기 시작한다. 인간이 살면서 맞닥뜨리는 모순이란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가령, 영화 『살인에 관한 짧은 노트』를 보면 “범인이 살인을 결심한 그 장소에 나도 있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같은 카페에 있었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살인범을 살리려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인간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다. 그렇듯 같은 시공간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이미 인간관계는 만들어 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도청과 감시가 가능한 마루바닥 한 장의 거리에서 드라이만과 시공간을 공유한 비즐러의 관계는 이미 침투와 흡수가 진행된 것이다. 신념이 바뀐다는 것은 그 신념이 옳지 않기 때문이다. 강조하건대 중요한 것은 관계는 사람을 변화하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만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그리고 당신은 당신만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나무는 나무 아닌 햇빛과 물과 흙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랑은 사랑 아닌 고통과 증오와 불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하자면 나는 나 아닌 누구의 딸, 어머니이며, 당신 역시 당신 아닌 누구의 아들, 아버지이다. 그러한 역할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으며 보이지 않는 강요 앞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의 삶이란 이미 ‘타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드라이만을 감시하고 도청한 비즐러의 삶이야말로 ‘타인의 삶’을 살았던 것이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한 드라이만의 삶 역시 ‘타인의 삶’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와 당신 사이, 심연
그러니 온전한 ‘나’는 세상에 없는 건지도 모른다. 지금은 무너진 사회주의 체제는 끊임없이 ‘나’를 버려야 가능한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나 ‘나’를 버리고 ‘우리’가 존재하리라 믿었던 이데올로기의 가능성에 대해선 내 빈약한 논리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관계란 이미 나, 당신, 우리라는 경계를 지니며 그 경계란 늘 가변적으로 기능한다. 사회주의 체제는 ‘우리’를 강조하면서 끊임없이 ‘나’나 ‘당신’을 ‘우리’일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당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개인이 희생해야 한다는 믿음에 불신을 제기할 수 없는 한, 당의 안전과 평화는 없다는 걸 그들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완벽한 감시체제를 갖추고 있던 동독 사회주의는 한 해 1인당 평균 2.3켤레의 신발을 신고 1인당 평균 3.2권의 책을 사고 한 해 6743명이 올A로 졸업을 하는 것을 보고하면서 국가의 안전을 위해 자살자의 통계는 밝혀지지 않는다. 드라이만은 예르스카의 자살을 계기로 동독에서 공개되지 않은 자살자의 통계를 비밀리에 서독《미러》에 기고하게 되는데, 이 위험한 일은 비즐러의 묵인에 힘입은 바 크다. 비즐러의 거짓 도청 보고로는 더 이상 드라이만을 체포할 만한 단서를 잡지 못하자 중앙안보국은 비즐러를 가차없이 좌천, 시골의 편지감시부 직원으로 쫒아 낸다. 제복이 사람을 만든다. 제복이라는 직각의 언어에서 벗어난 비즐러에게 처음으로 인간의 냄새가 풍겨왔다. 그리고 4년 7개월 후, 비즐러는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존재, HGW XX/7
오랜 시일 이후 드라이만은 자신이 도청되고 있었다는 사실과 자신의 행적을 도와준 사람이 비즐러임을 알게 된다. HGW XX/7, 기호로 존재했던 인간, 기호 자체였던 인간, 명령에 대한 임무 수행만이 목적이었던 인간, 드라이만은 비즐러의 행적을 추적, 길 건너편에서 직감적으로 그를 알아보고 따라간다. 이 장면에서 관찰자의 시점이 비즐러에서 드라이만으로 바뀐 사실은 영화가 주는 감상포인트이다. 드라이만은 우편배달부로서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는 비즐러의 삶을 흔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돌아온다. 그리고 책을 쓴다. 우편배달을 하는 비즐러의 눈빛에는 감시와 도청으로 날이 섰던 HGW XX/7의 모습은 더 이상 없다. 그리고 2년 후, 우편배달을 하던 중 비즐러는 서점 앞을 지나다가 드라이만이 쓴 책 광고 포스터를 보게 된다.
그는 서점 안으로 들어가 천천히 드라이만의 책을 집어 든다. 예르스카가 드라이만에게 선물로 주었던 책과 동일한 제목인 『선한 사람들을 위한 소나타』, 드라이만이 그 제목을 그대로 쓴 이유는 예르스카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라 하겠다. 표제가 적힌 겉장을 넘기고 다음 장에서 비즐러는 눈에 확 달려드는 구절을 만난다.
이 책을 HGW XX/7에게 바칩니다.
이 한 문장은 두 주인공의 감사와 수긍이 교감하는 최대치의 아름다움이자 울림이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결말에 있으며 그 장면은 단연코 이 대목이라 하겠다. 작가의 정의가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이다. 서점 주인이 짧게 말한다. “29.8유로, 선물이에요?” 라고 묻자, “아니 제가 볼 겁니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비즐러의 커다란 눈망울이 클로즈업되면서 화면은 정지한다.
서술어 없이 끝나는 시를 보는 느낌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특수요원을 교육할 때의 비즐러의 눈빛과 마지막 장면의 눈빛을 비교해 보는 것은 관람자의 몫이다. 그리고 관객을 서둘러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감독의 센스이다. 비즐러의 눈빛은 언어 이상이었다. ‘타인의 삶’을 살아오면서 결국 ‘자신의 삶’을 발견한 순간들, 그러나 삶을 위해서 진실은 늘 불편했고 그토록 불안했던 시간들은 어쩌면 허구였는지 모른다. “나는 그들의 삶을 훔쳤고, 그들은 나의 인생을 바꿨다.”는 말 역시 왜 한 드럼의 허구처럼 허무할까. 그런데 29.8유로 그거 얼마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