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첫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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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인가 스쳐지날 때 닿는 희미한 눈빛, 더듬어 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친 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낱낱이 드러나는 민낯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날 듯 말 듯 생각나지 않아 지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더욱 부질없어질 뻔하였다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는 첫눈이라고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더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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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누군가 어렵게 꺼낸다
끝까지 간 것의 모습은 희고 또 희다
종내 글썽이는 마음아 너는,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어제를 먼 곳이라 할 수 없어
더구나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
첫눈이었고
햇살을 우울이라 할 때도
구름을 오해라 해야 할 때도
그리고 어둠을 어둡지 않다 말할 때도
첫눈이었다
그걸 뭉쳐 고이 방안에 두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허공이라는 걸 가지고 싶었으니까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였으니까
저기 풀풀 날리는 공중은 형식을 갖지 않았으니
ㅡ이규리 - 당신은 첫눈입니까
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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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심코 내다본 아침!
풍경을 담고 더불어 커피를 하다가
'당신은 첫눈입니까 ' 시가 생각나고
선생님의 메타포에 젖는다
잘 쓰인 문장은 볼 때마다 다르다
예전에도,
예전과 같지 않은 지금 에도
옳다거나 옳지 않다거나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규정짓는 습관을 버리려고
규정했던 것들을 거부하다가
또 규정하고 있다
김수영 시인은 '폭포' 시에서 규정할 수 없는 것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다고 했는데, 규정을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이 아닐까
거부할 수 없어도
습관으로 살지는 말아야겠는데
그해 겨울
눈이 쌓이는 줄도 모르게 놀다가
여닫이 문을 열었을 때
그게 첫눈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동무네 집이 가까웠고
자기 집 대문을 두고 지나가는 건
습관이 아니었으므로
추억이야말로
첫눈이라 여기는 마음 같은 것 아닐까
당신은 첫눈입니까
2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