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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안 되는' 책이 주는 행복

구름뜰 2009. 9. 5. 07:15

한때 뼈아픈 가난을 격어본 세대가 버릇처럼 하는 말이있다.

"세상 참 좋아졌어."하긴 겉으로 보이는 세상은 틀림없이 옛날보다 좋아졌다.

굻주리는 사람들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많은 사람들은 끼니 걱정 대신 외려 비만을 걱정하는 형편이니 말이다. 그뿐인가.

가게에는 물건들이 넘쳐나고 거리에는 자동차가 그득하니,

만약에 사오십 년 전에 세상 떠난 조상님이 와서 본다면 눈이 휘둥그레질 만도 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세상이 정말로 살기 좋아 졌으면 우리는 전보다 더 행복해져야 할 터인데,

실상은 그렇지 않으니 웬일인가.자살률은 해마다 높아지고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 수는 점점 늘어난다.

사람들 눈빛은 나날이 사나워지고 인심은 자꾸만 메말라간다.

젊은 세대는 희망을 잃고, 나이 든 세대는 불안해 한다. 세상이 좋아졌다는데 도대체 왜?

 

분명한 것은, 물질이 풍요로워진 만큼 정신은 쇄해졌다는 사실이다.

사립문 열어 두고 살던 시절의 훈훈한 인정까지 돌이키지 않더라도,

우리네 삶과 마음엔 본디 넉넉한 여유가 있었다.

비록 먹기 살기는 힘들었어도 이웃에게 내미는 따스한 손길과 자연을 벗 삼는 슬기와

고단한 일상을 어루만지는 혜학이 있었다.

가난조차 멋으로 승화시키는 낭만도 있었다.

 

하지만 물질이 모든 가치를 평정하면서 마침내 우리는 마음의 여유를 잃었다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크기에 자존심을 걸고

자식 사교육비에 삶을 잡히면서 정신의 영역은 설 자리를 잃었다.

모든 가치는 돈으로 환산되고 가난은 다만 앙상한 부끄러움이 되었다.

책 읽고 사색하던 시간은 오롯이 부동산과 주식투자의 쇼핑 정보를 얻느데 쓰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돈 안되는' 모든 일은, 그것이 설령 영혼을 구하는 일이라 해도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가 정신의 회복에 눈을 돌려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물질은 그만하면 됐으니 이젠 정신의 풍요를 노래하자는 말이다.

물질만 바라보고 달려온 조급함이 빚은, 소득 양극화나

정의롭지 못한 분배 같은 근본 문제를 풀려면

우리 모두 '사람의 눈빛'을 되찾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인간성을 되찾는 길은 먼 데 있지 않다.

지금 당장 손에 책을 들면 된다.

믿고 싶지 않지만 우리나라 가구당 도서 구입비는 한달에 한 권 값에도 못 미치며,

그 마저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국립 중앙 도서관)

책을 멀리한 사람의 정신이 황폐해지는 것은 ,

마치 불 꺼진 모닥불이 온기를 잃는 것과 그 이치가 같다.

 

따지고 보면 책조차 정신보다 물질 쪽에 기우는 것이 요즈음 세태의 저울추이다.

이를테면 옛날 사람들은 '돈을 모아서' 책을 샀다.

하지만 요새는 많은 사람들이 '돈을 모으기 위해' 책을 산다.

처세술과 재테크로 대표되는 이른바 실용서가 언제나 베스트셀러의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 저울추를 조금만 돌려놓으면 어떨까. 어떻게 하느냐고?

이제까지 '돈이 안 된다'는 까닭으로 버림받아 온 문학책과 인문예술 사회과학 책을

부러라도 찾아 읽는 것이다. 장담컨데 이 일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자부심과 함께

행복감을 선사할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사람다움을 느낄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또 있으랴.

 

그래서 감히 권한다. 햇볕 고운 초가을 낮 공원 걸상에 앉아 읽는 시집 한 권,

일하다가 쉬는 틈에 차 한 잔 마시며 펼쳐드는 인문서 한 권,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한 줄 한 줄 음미하듯 읽어보는 고전 한 권은 어떨까. 

아니면 힘든 집안일 끝내고 잔잔한 음악과 함께 뺘져들어 보는 소설책 한 권,

주말 저녁 아이 손잡고 찾은 동네 도서관에서 느긋하게 넘겨보는 명화집 한 권,

저녁 시간 온 식구가 둘러앉아 연극하듯 번갈아 읽어보는 옛날 이야기책 한 권도 좋을 것이다.

그런 것이 정 따분하다면 아기자기 눈을 즐겁게 하는 만화책이나 그림책인들 어떠랴.

 

책 읽기는 결코 사치스러운 놀음이 아니다.

요즈음처럼 '쓸모'가 '옳음'을 뛰어넘는 세상에서,

그것은 어쩌면 사람이 스스로 사람다움을 확인하는 몸부림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일찍이 현명한 선인은 말하였다.

독서는 굶주림과 추위와 근심 걱정과 질병의 고통까지도 덜어 준다고,(이덕무)

그가 말한 책이 노자 장자 같은 '돈 안되는' 책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서정오- 아동문학가

매일신문- 문화칼럼 9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