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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이 더 어려워요

요가를 시작한 지 7년이 되었다살아온 날들과 일상의 자세는 몸 구석구석에 진실되게도 베어있다완성 체위는 요원하고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세월의 유수만 실감한다요가 힘들지?밖이 더 힘들어요엄마랑 다니는 20대 하영 씨의 현답이다새내기 그녀의 밖을 응원한다힘든 동작에선 아픈 곳으로 숨을 뱉어낸다는 마음으로 오 초 십 초 삼십 초를 견디다 보면 통증이 누그러지기도 한다호흡에 집중하고 몸을 알아가는 일오늘도 쉽지 않은 요가수업을 마쳤다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이 나를 키운다

사람향기 2025.04.28

和色(화색)

벚꽃이 가고 나면왕벚꽃이 온다하늘을 보거나 비나 바람을 맞는 일같이 예감이 틀리지 않았던 시간들꽃은 피고또 가고 또 오고몸의 기억은 좋은 시절에 연한 것이겠다그늘도 분홍 같은 왕벚꽃내 심상에도 꽃이 핀다면 몽글몽글정도에는 미칠 것 같은 당겨도 보고 밀어도 보고어슬렁거려도 보고딴 곳으로 눈을 돌려도 보고그곳에 가면 볼 수 있는 돌아보면너의 화색은 언제나 변함없었고때마다 꽃의 안부아래서 서성였다네 꽃은 바람과 함께였다네

사람향기 2025.04.17

땅꺼짐에 관하여

바닥인 줄 알았는데바닥이 아니라는 걸 실감하는 일허방다리겠다허공이었다가 동체에서 내려발이 대지에 닿을 오는 안도바닥은 그런 것인데봄날대지를 뚫고 나오는 생명들 지천인데땅 꺼짐 현상이 우후죽순이다작게는 균열이 생기고 울그락 불그락 내려앉고 주저앉기도 있다상수나 하수관로가 존재하고서울엔 50년 넘은 관로가 지천이라고 우려와 염려가 손님처럼 오는 것이다불안이 먼저 오는 일기우는 기우가 아니었을까하늘 아니고 땅이다

사람향기 2025.04.16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지렁이에 대해 생각하다

찬란한 대낮, 계단을 올라가는데 무엇인가 굵은실 같은 것, 아니 고무줄 같은 것이 반쯤 잘린 채 햇빛을 맞고 있었다. 뭘까, 고개를 수그리고 바라보니지렁이였다. 누가 밟고 지나갔는지 반 토막만 남은것이었다. 아하, 어제 온 비에 길로 나온 것이었군, 가엾게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어버렸군, 그냥지나치려는데 무엇인가가 길을 막았다, 그림자였다, 내 그림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내 그림자.ㅡ 강은교 시집 1999

시와 수필 2025.03.29

박성녀 개인전

겨울과 겨울사이"그냥 겨울을 담았다고 보면 될 거예요"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저 '사이'라는 단어가 좋다너와 나 사이나와 나 사이가을과 겨울 사이3시에서 4시 사이사이는 새로운 사이를 더하는 것 같이."멀어서 오라는 건 아니고 보고차원"이라고 했지만 그녀 그림은 무척 궁금하다. 국회라 신분증 필요하다고.장소 국회아트갤러리의원회관 3층25년 2월 17일 ~ 2월 28일

섣달그믐

눈이 많이 내렸다옛날에 이날은 설빔을 머리맡에 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설날 신새벽엔 엄마가 떡국을 끓여서 한복을 입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새배를 갔었다육촌오빠였던 지금은 고인이 된 봉이오빠와 철이는 잠도 안잤나 싶게 우리는 아직 이불속인데도 여명처럼 새배를 왔었다 언제나.집성촌이라 우리 할아버지의 형인 큰 할아버지가 계셨고 큰할머니는 두 분이어서 새배 갈 곳이 서열따라 한두 곳이 아니었다 세뱃돈은 백 원이면 족했다.그 시절 최고의 날이었다 명절은핵가족으로 홀쭉해진 섣달그믐날은 차고 바람도 거센데 일없이 옛 생각에 잠긴다. 돌아보니 옛날은 지나은 역 같은 것이어서인지 곳마다 때마다 좋았다.

사람향기 2025.01.28

화살과 노래

나는 허공을 향해 화살을 쏘았으나화살은 땅에 떨어져 간 곳이 없었다.빠르게 날아가는 화살의 자취누가 그 빠름을 따라갈 수 있었으랴.나는 허공을 향해 노래를 불렀으나노래는 땅에 떨어져 간 곳이 없었다.누가 날카롭고도 밝은 눈이 있어날아가는 그 노래 따라갈 수 있었으랴.세월이 흐른 뒤 고향의 뒷동산 참나무그 화살 부러지지 않은 채 꽂혀 있었다.나의 노래 처음부터 마지막 구절까지친구의 가슴속에 숨어 있었다.ㅡ 롱펠로우

시와 수필 2025.01.18

엄동설한이 되어서야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른지 안다’는 말이 있다어려울 때라야 그 사람의 진가를 알게 되는 인간사를 두고 한 비유다고향동무가 건강이 좋지 않다공부를 잘했던 친구 영민했으므로 기억이나 운동신경에 관련된 병에 걸릴 줄은 짐작도 안 되는 일이다어떤 일은 일어난 뒤에야 깨닫는다아무 일 없는 일상이 최선이었구나라고.지금 불행하지 않다면 좋은 때 아닐까!'군자는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서도당파를 이루지 않고소인은 당파를 이루면서.여러 사람과는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말도 있다모두 논어 얘기다지혜로운 문장을 보는 반가움은 독서의 즐거움이다해거름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겨울나무들이 선명해지고산의 핏줄들 생기를 찾는듯하다여럿이 어울려도 당파를 만들지 않는다는 말, 즉 군자의 모습에서 삶은 태도나 가치관을 ..

사람향기 2025.01.08

0546 예인회

글쟁이들은 동인지를 내고그림쟁이들은 전시회를 가지는 12월이다열심히 쓰고 그린 이들은 이맘때 뿌듯하고설렁설렁 지내온 이들은 옹색해질 수도 있는 때다.그림도 글도 작가의 한 부분.작품을 통해 거듭나고 깊어지며 또 나아갈 것이다.그리고 또 그렸을 눈길 손길 마음길까지 결결한 색의 향연이다그녀의 수국을 처음 본 건 한 5년 전쯤 일게다수국과 잘 어울리는 그녀오늘도 수국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간 걸음이기도 했다.대작 '수국 2' 우측 화면의 명암은 경이로웠고 황홀경이었다. 여기(구미 새마을테마공원 1층전시실)에 원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대작 태극기아래 그녀의 색들이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수국 앞에서 한참을 머물다 왔다.방명록은 마지막 한 장이 남아있었다.생각나는 대로 순간의 감정을 몇 글자 적..

사람향기 2024.12.14

비 아니고 눈

창틀에 쌓인 눈이 제법 두둑한 찻집산은 다정했고 커피는 넉넉하였다남쪽은 눈 온 흔적도 없는데영등포행 ktx는 설국열차 같았다어떤 일은비라고 해놓고 눈이 오는 일처럼 반갑기도 하다어릴 적 잠에서 깨 여닫이 문을 열었을 때마당도 앞집 지붕도 하얗게 덮여있는 일이란 얼마나 눈부셨던가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눈 내리는 바깥풍경 속에서 자신에게로 오고 있을 나타샤를 기다리며 세상에 지는 건 아니고 더러워서 떠나는 것이라고 객기를 부렸다..눈이 오는 건 자신이 나타샤를 사랑하여서라고눈 쌓인 산을 곁에 둔 일도 명작 같은 커피도 잠깐 멈추다 가는 시간 같기도 하였다.시간이 멈출리야 없지만흐르지 않아도 되는 일같이따뜻한 커피를 탐하는 시간찻집에 유독 사람이 많은 건어쩌면 서로를 흠향하는 일과 닮아있기 ..

사람향기 2024.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