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179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한 소회

예전 시를 지도해 주시던 시인은 쓰기를 두고 선택의 문제라고 했다. 고급독자로 남든지 작가로 남든지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하고 채식주의자로 토론수업을 했던 지인들과 오랫만에 한나절을 보냈다. 맨부커상 수상 소식과 함께 그녀의 문장은 내게로 왔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가 연작이고 세 곳의 계간지를 통해 발표된 것과 몽고반점은 이상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대충 보고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안 본 것보다는 안다고 할 수야 있겠지만 다시 보고 또 볼 일이다 실컷 얘기하고 헤어졌는데 전화가 왔다 서점에 한강 책이 동이 났다고 책 좀 빌려달라고... 이렇게 큰 일을 당하면 실감이 날까 반가운 소식이다

책향기 2024.10.12

작은 위로 / 권미자

경자 그 아이는 꽃이 되었다 아주 오래전에, 잿빛 냇물 흐르던 광산마을 모래펄은 은빛으로 눈이 부셨다 강구벌레가 지은 오목한 모래 뻐꾸기 집 파 내려가면 뻐꾸기가 뻐꾹, 하며 나올 것 같다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놀았다 엄마는 안 오고 등에 업힌 어린것이 자꾸 보챘다 후딱, 일어서려는데 아기 허리가 뒤로 젖혀져 넘어갈 뻔하였다 ' 이놈의 지지배' 밤부터 아기는 신열이 끓고 아팠다 아기가 뒷산에 동그마니 묻힐 때까지 그 일은 비밀이었다 봄날, 몰래 가 본 무덤에 생겨난 보라 제비꽃 아기는 가냘퍼서 제비꽃이 되었나 보다 자꾸만 납작해지는 기억을 꺼내 들고 엄마를 찾아갔던 날 "아기 수명은 거기까진 게야, 니 탓이 아녀' 엄마는 밤바다처럼 말했다 외로울 때면, 마음 저편에 웅크려 앉은 작은 아이가 보인다 비밀은..

책향기 2024.06.07

사랑의 다른 이름

**23년 5월에 나온 이규리 시인의 산문집이다. 뵐 때마다 강조하셨던 시학이기에 익숙하지만 경구처럼 새록새록한 문장들이다. '불편의 시학'을 통해 내가 시에 가지게 된 가치관은 내 삶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고정관념에 관한 자각, 삶의 인식의 전환, 불편, 불안, 불리에 대한 인식 등 여기 불편의 시학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손안에 두고 수시로 보기 위해 블로그에 올려본다. 즐감하시길....., '불편'을 이야기할 때면 자꾸 머뭇거리는 마음이 되곤 한다. 불편, 불안, 부족, 이런 단어들은 되도록 기피해야 한다는 오랜 이익주의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 글은 그 단어들이 내포한 기운을 간과할 수 없고 숨은 뜻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으로 쓰게 되었다. 통상 누구나 불편보다는 편안을, 부족보다는 만족..

책향기 2023.09.26

체호프 단편선 / 내기

오늘 문득 체호프 단편 '내기'가 생각났다. 12년 전에 읽고 서재에 꽂아둔 이 책이 왜 보고 싶어 졌는지는 모르겠다. 니체를 보다가 생각하다가..... 읽어 본 단편 중 임팩이 가장 컸던 책.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기에 좋은 책,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체호프 단편선에는 열 편이 실려 있다 '내기'는 그중 여덟 번째 이야기다. 도입부 시점은 늙은 은행가가 십오 년 전 그날을 회상하며 들어간다. 십오 년 전 그는 젊었고 부자였다. 자신이 주재한 파티장에서 흥미로운 주제가 오갔다. 사형과 종신형에 관한 열띤 토론이었는데 은행가는 당당하게 자신의 주관을 밝혔다. "사형이 종신형보다 더 윤리적이고 인간적이라고 봅니다. 사형은 단번에 죽이지만 종신형은 천천히 죽이는 거죠" 파티장소에 있던 스물다섯 살 젊은 변호..

책향기 2023.02.18

마음혁명 / 김형효

마음이 욕망의 기라면, 기는 에너지로서 불멸이다. 인생은 거의 무의식적인 기의 습관에 따라 움직인다. 이것을 우리는 습기(習氣)라고 부른다. 즉 무의식의 욕망이 습기다. 무의식은 땅속에 박혀 있는 의식의 뿌리에 해당하므로 의식은 무의식의 습기에 영향을 받아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한다. 무의식의 습기를 바꾸지 않고서는 아무리 의식의 문제점을 이야기해 봐야 당위론으로 끝나고 만다. 나의 인생은 결국 나의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실존적 생각과, 순간은 삶과 죽음의 양면성이 공존하는 시간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은 살면서 다른 한편으로 죽어가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는 죽음을 응시함이 인간을 소유론적 습기의 속물근성에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게 된다. p51 ㅡ김형효 철학산책 * 마음혁명 중에서 * * 마음혁명은..

책향기 2023.01.28

최진석 - 북토크에 다녀오다

** 구미는 처음이라는 교수님, 공단도시로만 알고 있었는데 삼일문고에 와 보니 서점이 아니라 문화공간 같다며 소회를 밝히셨다. 인상적이었던 말씀 올려본다 불안은 품는 것이다, 내공을 키워라 누구나 불안하다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일반 명사는 존재하지 앓는다 사랑, 아버지 고유명사만 존재하는 것이다 사랑도 사랑하자고 마음먹을 때까지만 사랑이고 이후는 사랑의 관념을 생각하고 그것을 집행하려고 한다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은 하나다 ㅡ'정신만 빛날 수도 있지만'을 전제로 정신과 물질은 궤를 같이 한다는 말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다만, 가난한 경우일 수 있다고.. 죽음은 없고 죽어가는 상태가 있을 뿐이다. 하루키 ㅡ 토양에서 승화된 주제를 잘 표현했다 모옌 ㅡ그의 문제를 보편적으로 승화시킨 사람. 이 ..

책향기 2023.01.19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

**강의가 워낙 인상적인 최진석 교수님이 구미에 오신다. 지난 12월에 초판발행된 이 책으로 북토크가 삼일문고에서 열린다. 책을 읽어가면서 드는 생각은 힘을 이렇게 뺄 수가 있는가 싶게 편했다. 강한 어조, 정확한 발음에만 익숙했던 말씨와는 달랐다. 말보다 문장이 더 매력적인 작가들에 비하면 의외였다. 잘 읽혔다. 몰입하기에 좋았다. 옮겨두고 되새기고 싶은 문장들만 스토리에 올려본다. 사흘 후 강연에선 어떤 인상, 어떤 낯섦으로 생산자가 되어주실지. 나는 또 어떤 생산으로 연결되고 연계될지 기다려진다. 각설하고 본문으로 들어가 보자 2부 우주를 겨드랑이에 낀 채로 자유로운 단계는 없는 것을 꿈꾸는 단계이다. 없는 것을 꿈꿀 때 인간은 도전, 용기, 모험적인 활동을 한다 똑같은 내용의 얘기를 들어도 사람마..

책향기 2023.01.14

유토피아 감상문

토마스 모어는 (1478~1535) 57세에 처형당했고 38살 (1516년)에 유토피아를 썼다. 저는 유토피아를 통해 '인식에 관한 문장'에 관심이 갔습니다. 한 사람의 가치관은 그의 생애와 무관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식'이 삶을 규정짓는 거라 믿으며 저는 제 인식을 향상해 가는 방법에 관심이 많습니다. 거슬리는 맘이 생기면 저는 바로 제 속을 들여다봅니다. 그 마음들은 대체로 관계에서 '소화시키지 못한 찌꺼기 감정'임을 알게 됩니다. 쓰레기 치우듯 이해가 수반된 개운한 상태를 저는 즐깁니다. 각설하고 유토피아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부에서 라파엘이 섬나라 주민들에게 나침반 사용법을 알려주자 겨울에도 항해를 했고, 도움 되리라 믿었던 일이 커다란 불행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선의로 한 일이 안..

책향기 2022.10.18

이성복 시인을 만나다

느낌/이성복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서 처음 꽃이 필 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 종이 위의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강/이성복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 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 위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 조각이 미지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서해 / 이성복 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 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책향기 2021.10.16

'눈' 이후 눈이 자꾸 밟힌다. 눈 뒤의 발자국처럼. "시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시 쓰기라는 줄 위에 계속 머물러 있는 일일세. 삶의 매 순간을 꿈의 높이에서 사는 일. 상상의 줄에서 한순간도 내려오지 않는 일일세. 그런 언어의 곡예사가 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일세." p100 * 네에 주가 줄타기를 좋아한 이유는 '균형'이었고 소세키는 무사에서 무너진 '균형'을 예술에서 찾았다고 했다. 유코의 시는 통합을 의미하는 회화에도 이르게 되고 봄눈송이는 그걸 보고 "엄마를 그린 그림 중 가장 아름답다" 했다. 이 책 어딘가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문장도 나온다. 태어나. 연기하다, 죽는 사람과 삶의 줄 위에서 '균형' 잡는 사람으로요 전자가 배우라면 후자는 곡예사라고.. 언어의 곡예사는 아니지만 '꿈..

책향기 2021.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