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761

손을 씻는다

하루를 나갔다 오면 하루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든다 내심으로는 내키지 않는 그 자와도 흔쾌하게 악수를 했다 이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될 것들을 스스럼없이 만졌다 의수를 외투속에 꽂고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코리아나 호텔 앞 나는 공범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비누로 손을 씻는다 비누가 나를 씻는 것인지 내가 비누를 씻는 것인지 미끌미끌하다. ㅡ황지우

시와 수필 2024.11.03

겨울 ㅡ나무로부터 봄ㅡ나무에로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 피는 나무이다 ㅡ황지우

시와 수필 2024.11.03

그러므로 그래서

산책은 나무에서 나와 나무 아닌 곳으로 들어간다 해 질 무렵이면 마음은 곧잘 다른 마음이 되어 노을을 낭비하였는데 이어지는 저녁의 이야기는 흐린 은유는 아무 때나 친절하면 안 된다는 듯 우리는 지나가는 그늘 공기조차 알아채지 않도록 그건 나무에게 이름을 걸어주지 않는 이유와 같을 것 없는 슬픔이 도와 그러므로 그래서 안녕히 가세요 나의 시간 ㅡ이규리 * 나무에서 나와 나무 아닌 곳으로 배려가 배려 아닌 곳으로 이렇게 순한 문장으로 순하지 만은 않은 어법의 대가 이규리 시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그래서 선생님 시는 한번 맛보고 나면 모를 수가 없다 살다가 문득 맘 가는 시 찾게 되는 시 한 줄도 못 외우고 있어도 인식으로 와닿는 추석명절을 앞두고 추석 아닌 것처럼 지낼 요량으로 들여다본다 그러므로 그래서.,...

시와 수필 2024.09.14

넘어져 본 사람은

넘어져 본 사람은 안다 넘어져서 무릎에 빨갛게 피맺혀 본 사람은 안다 땅에는 돌이 박혀 있다고 마음에도 돌이 박혀 있다고 그 박힌 돌이 넘어지게 한다고 그러나 넘어져 본 사람은 안다 넘어져 가슴에 푸른 멍이 들어본 사람은 안다 땅에 박힌 돌부리 가슴에 박힌 돌부리를 붙잡고 일어서야 한다고 그 박힌 돌부리가 일어서게 한다고 ㅡ이준관

시와 수필 2024.08.10

오늘의 약속

남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우리들의 이야기, 서로의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지나간 밤 쉽게 잠이 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든지 하루 종일 보고픈 마음이 떠나지 않아 가슴이 뻐근했다든지 모처럼 개인 밤하늘 사이로 별 하나 찾아내어 숨겨놓은 소원을 빌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실은 우리들 이야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많지 않은 걸 우리는 잘 알아요 그래요, 우리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오래 헤어져 살면서도 스스로 행복해지기로 해요 그게 오늘의 약속이에요. ㅡ나태주

시와 수필 2024.03.12

홍매화 겨울나기

그해 겨울 유배 가던 당신이 잠시 바라본 홍매화 흙 있다고 물 있다고 아무 데나 막 피는 게 아니라 전라도 구례 땅 화엄사 마당에만 핀다고 하는데 대웅전 비로자나불 봐야 뿌리를 내린다는데 나는 정말 아무 데나 막 몸을 부린 것 같아 그때 당신이 한겨울 홍매화 가지 어루만지며 뭐라고 하셨는지 따뜻한 햇살 내린다고 단비 적신다고 아무 데나 제 속내 보이지 않는다는데 꽃만 피었다 갈 뿐 열매 같은 것은 맺을 생각도 않는다는데 나는 정말 아무 데나 내 알몸 다 보여주고 온 것 같아 매화 한 떨기가 알아 버린 육체의 경지를 나 이렇게 오래 더러워졌는데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같아 수많은 잎 매달고 언제까지 무성해지려는 나, 열매 맺지 않으려고 잎 나기도 전에 꽃부터 피워 올리는 홍매화 겨울나기를 따라잡을 수 없..

시와 수필 2024.02.29

당신은 첫눈입니까

누구인가 스쳐지날 때 닿는 희미한 눈빛, 더듬어 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친 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낱낱이 드러나는 민낯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날 듯 말 듯 생각나지 않아 지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더욱 부질없어질 뻔하였다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는 첫눈이라고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더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누군가 어렵게 꺼낸다 끝까지 간 것의 모습은 희고 또 희다 종내 글썽이는 마음아 너는,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어제를 먼 곳이라 할 수 없어 더구나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 첫눈이었고 햇살을 우울이라 ..

시와 수필 2024.01.03

그런 사람

봄이면 꽃마다 찾아가 칭찬해 주는 사람 남모르는 상처 입었어도 어투에 가시가 박혀 있지 않은 사람 숨결과 웃음이 잇닿아 있는 사람 자신이 아픔이면서 그 아픔의 치료제임을 아는 사람 이따금 방문하는 슬픔 맞아들이되 기쁨의 촉수 부러뜨리지 않는 사람 한때 부서져서 온전해질 수 있게 된 사람 사탕수수처럼 심이 거칠어도 존재 어느 층에 단맛을 간직한 사람 좋아하는 것 더 오래 좋아하기 위해 거리를 둘 줄 아는 사람 어느 길을 가든 자신 안으로도 길을 내는 사람 누구에게나 자기 영혼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 내어 주는 사람 아직 그래 본 적 없지만 새알을 품을 수 있는 사람 하나의 얼굴 찾아서 지상에 많은 발자국 낸 사람 세상이 요구하는 삶이 자신에게 너무 작다는 걸 아는 사람 어디에 있든 자신 안의 고요 잃지 않는..

시와 수필 2024.01.01

허(虛)의 여유

문으로 들어온 것은 집안의 보배라 생각지 말라"는 말이있다. 바깥 소리에 팔리다 보면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바깥의 지식과 정보에 의존하면 인간 그 자체가 시들어 간다. 오늘 우리들은 어디서나 과밀 속에서 과식하고 있다. 생활의 여백이 없다. 실(實)로써 가득 채우려만 하지, 허(虛)의 여유를 두려고 하지 않는다. 삶은 놀라움이요, 신비이다. 인생만이 삶이 아니라 새와 꽃들, 나무와 강물, 별과 바람, 흙과 돌, 이 모두가 삶이다. 우주 전체의 조화가 곧 삶이요. 생명의 신비이다. 삶은 참으로 기막히게 아름다운 것, 누가 이런 삶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그 어떤 제도가 이 생명의 신비를 억압할 수 있단 말인가. 하루해가 자기의 할 일을 다하고 넘어가듯이 우리도 언젠가는 이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시와 수필 2023.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