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수필

오동나무 연상 - 윤오영

구름뜰 2010. 5. 19. 09:54

 

 

 전에 어느 선비 방에서 본 오동나무 연상. 나는 오늘 C노부인을 만나보고 왜 갑자기 이 연상이 떠오르는 것일까.

"한국의 여성은 서구의 여성에 비해 젊음을 오래 지니지 못한다." 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서구의 여성과 비교해본 일은 없지만, 한국 여성들의 젊은 모습이 너무 짧다는 것만은 여러 번 실감해왔다.

 

 오래간만에 옛 친구를 찾아갔더니 친구는 없고 그 부인이 나와서 반기며 인사를 했다. 젊어서 내 친구와 연애를 할 때부터 봐온 여성이다. 그 말쑥하고 곱던 미인의 모습은 간 곳 없고 부엌데기가 다 된 헙수룩한 중년 부인의 모습을 보고 허무한 감회를 느꼈다. 그의 곱던 젊은 시절도 불과 얼마 안 되는 그 동안에 사라지고 말았구나 하는 초창한 심회를 금할 수가 없었다. 명민하고 상냥하면서도 날카로운 이성적인 이론이 항상 나를 놀라게하던 문학소녀가 있었다. 눈은 어느 때나 샛별같이 반짝이고 웃는 볼이 귀여웠다. 그와 항상 새롭게 차린 새뜻한 자태가 더욱 싱그러운 젊은 향기를 풍기었다. 그런데 십여 년 후엔 어린애를 업고 짜증을 내며 악을 쓰는 가정부인의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봤다. 대학생 때는 여왕에 뽑히고, 미인으로 알려져 인기를 끌고, 남의 이목에 오르내리던 여성이 중년이 못 돼서 뚱뚱하고 거친 촌부인의 모습이 되가는 수도 있었다. 나들이를 하기 위해 화려하게 성장을 하고 나타나기는 했으나 떡부엉이 같아서 도무지 어울리지 아니한다.

 

 몇 해 전만 해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젊은 여성과 데이트를 하는 기분이 제법 여성다운 향취에 어우러져 있었지만, 불과 몇 해 안돼서 버커리가 되거나 왈패가 돼서 반남성화 경향이라 할가. 중성화라고 할까. 젊은 여성미는 다시 찾아볼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과연 한국의 여성은 젊음을 지니는 기간이 너무 짧구나 하고 느낀 것이 있었다. 결혼을 해서 살림을 하고 애낳이를 하면 여자는 고만이지요. 고등학교를 졸업햇거나 대학을 졸업했거나 가정에 들어 앉으면 다를것없는 부엌데기 살림꾼인데, 여자란 직업여성이 안 될 바에야 들어앉아 살림 배우는게 제일이건만, 집에 붙어 있지를 않으니 학교라도 보내야 하고, 대학 졸업장이라도 있어야 결혼조건이 성립되니 졸업시킨다는, 정말 딱한 푸념을 들은 적도 있다.

 

 

 

 

 그런데 나는 오늘, 오랫동안 지방 학교에서만 근무했던 옛 친구가 서울 학교 교장으로 왔다는 말을 듣고 그의 집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의 모친은 내가 젊어서 뵈온 적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생존해 계신다는 말을 듣고 반가웠으며, 그 분도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올해 85세의 노인이건만 머리 하나 아니세고 정정할 뿐 아니라, 옛 모습 그대로였다. 물론 80이 넘은 상노인이 옛 모습일 리야 만무하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그 곱게 매만진 머리. 깨끗하고 날렵한 몸매, 안상하고 조용 나직하며 애정이 깃들인 말씨, 그 단아한 옷매와 몸가짐, 노인답게 흉허물 없으면서도 몸에 밴 교양 있는 예의, 나도 모르게 여성에 대한 남자의 자세를 의식적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80이 넘은 그는 아직도 여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늚음 속에 젊은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돌아보면서, 아마 이 노인이 현대에 남아 있는 마지막 존재일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것이, 옛 선비 방에서 봤던 오동나무 연상(작은 궤)이다.

 

 그 선비의 사랑에서 본 연상은 길이가 두뼘 남짓, 너비가 뼘 반이 못되는, 그리고 높이가 뼘 반에 가까운 오똑하고 걀쭉한 조그마한 오동나무 연상이었다. 두껑을 열면 벼루 , 먹, 붓들이 들어있고, 서랍에는 장식이나 고리가 없이 제물 구멍으로 여닫게 되고 아래층은 텅 빈 간소한 궤였었다. 그런데 오동나무에 제 길이 들어 까맣게 부드럽게 윤이 나는 그 아름다움.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이 스며들게 하는 것이었다. 한 백년이 됐다는 말이 그대로 믿어지는 것은, 두고 두고 매일매일 손때가 묻고 깨끗이 길이 들어 여러 해 내려오지 않고는 저렇게 곱게 길이 들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건이 오래 되면 처음 만들 때의 손결은 사라지고 빛은 후락해지고 흠이 생기고 사개가 어긋나기가 쉬운 것이지마는, 그쯤되면 손결은 더욱 살아나고 빛은 더욱 곱고 흠은 티 하나 없이 고와지고 물건은 더욱 탄탄해 보이는 것이다.----매일매일의 사람의 손길이 매만져온 살(肉)과 情이 혼합해서 자라온 물건이었다.

 

 

--중략,--

 

 지금 학교에서 체육을 배우고, 화장품이 발달되고, 미용체조, 스포츠 등 젊음과 아름다움을 마음껏 누리고 기를 수있건만 여성미의 젊음을 오래 지니지는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갈 때만,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처럼 야단스럽게 차리고, 평상시나 가정에서는 잉편(孕便)할 대로 해이하니 몸에 배지 못한 젊음이, 열흘 가뭄에 소나기처럼 미용체조나기타 방법으로 살아날 리 없고, 몸매에 배지 못한 옷이 호사를 한들 마네킹이 걸친 옷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몸가짐뿐이 아니라 말의 말씨가 그렇고, 풍기는 정서와 지성이 또한 그렇다. 어찌 여자뿐이랴. 남자도 그렇다. 더욱이 글을 쓰는 사람도 평소에 문정(文情)과 문심(文心)을 기르지 않고 붓끝의 재주에만 맡기면 그 문자에 품위와 진실이 깃들이기 어려울 것이 아닌가.

 

  물고기는 잠시도 물에서 떠나지 아니함으로써 젊음의 미를 길이 지닌다. 참을 사는 사람은 잠시도 허튼 생활에서 자기를 소모하지 아니한다. 글을 사랑하는 사람은 문정( 文情)과 문사(文思)에서 잠시도 떠나지 아니함으로써 속기(俗氣)를 떨치고 문아(文雅)한 품성을 기른다. 여기서 비로소 아름다운 글이 써진다. 그러기에 한 편의 명문은 10년의 교양에서 온다고 했다. 음미함직한 말이다. 그날그날의 생활, 그 순간 그 순간의 자세란 이렇게 중요한 것이요. 이것이 모이고 모인 축적이 없이는 미는 탄생하지 아니한다.

 내 친구의 모친 노부인을 만나고 나서, 문득 옛 선비의 방에 놓였던 오동나무 연상이 떠오르는 것도 이유 없는 감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윤오영 (1907-1976)

1959년 '현대문학'에  '측상락'을 발표하면서 수필을 쓰기 시작하여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많이 발표한 작가다. 수작으로는 <방망이 깍던 노인> <양잠설>등이 있다. 수필창작외에도 이론 연구에도 기여했다. 1972년 3월 창간한  <수필문학>에 <수필문학의 첫걸음>과 <수필문학강론>을 연재..  <수필문학입문>등을 통해 수필문학관을 피력, 이론 정립에도 힘을 기울였다.

한학자로서 동양고전 이해로 해박한 지식과 정확한 분석,, 풍부한 전통문화를 향수하고 있는 작가로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등단을 했지만 20여년 교직에 근무,, 혼자서 공부하였고..  50세가 넘어서부터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작품을 읽다보면,

작가도 보이고, 작품속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자동으로 나를 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 씨익,,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엄두도 흉내도 쉽지 않은 일..

 

딴 쪽으로 위안을 삼는다. 이런 작품을 만나는 기쁨도 크다고,,,

좋은 수필은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이런 글을 쓰는 작가.. 이런  멋진 여인!

80이 넘어도 아들의 친구에게 여성에 대한 남자의 자세를 의식적으로 느끼게 할 수 있는,,

80이 넘고도 여성을 잃지 않고 있는 모습이란,,

내 깜냥으로는 노부인의 고아한 아름다움은 짐작도 불가능하니..

10년의 교양에서 나온다는 한편의 아름다운 글은 내게는 아마도 영원이 요원한 일일 터이다.

그러니 이런 명문을 만나는 것으로도 족해야 할것같다.. 아무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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