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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효도

구름뜰 2011. 2. 9. 17:47

비교적 착한 아이로 자랐다. 입시에 실패한 적도 가출한 적도 없다. 사춘기를 지나며 가끔 눈을 내리뜨고 입을 꽁꽁 다물긴 했어도 그쯤이야 건강한 반항이나 방황일 터였다. 5남매의 딱 가운데서 특별한 관심도 애정도 받지 못했다.

시어머니는 잊지 않는, 최소한의 감사도 의무감도 친정어머니에게는 없다. 섭섭할 때쯤 겨우 전화를 넣거나 찾아갈 뿐, 맏이도 아니고 아들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를 홀가분하게 누린다. 그 친정어머니가 국수를 삶고 있는 중에 생각나는 거다. 대부분 아이랑 먹는 저녁은 간단한 외식이나 인스턴트 음식으로 떼울 궁리를 하지만 모처럼 멸치 국물을 내고 양념장을 만들고 바쁘게 국수를 건지고 있던 중이다.

여고시절 나는 오래 앓았다. 병문안을 온 친구들을 위하여 어머니는 석유곤로눈높이를 맞추어 불을 댕기고 국수를 삶았다. 소기의 목적일랑 홀랑 잊은 채 맛있게 먹고 재미있게 깔깔대다 돌아가는 친구들이 부러워, 나는 한참씩 혼자서 훌쩍댔을 뿐 어머니를 돌아볼 생각은 눈곱만치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엄살을 떨었을지도 모른다.

동시에 여러 개의 화력을 사용할 수 있는 가스레인지에 딸랑 2인분의 국수를 삶기도 귀찮아서 한꺼번에 많이 넣어서는 넘치고 풀어지고 이렇게 번거로운데. 아이는 엄마가 모처럼 해주는 거라고 얼른 비운 그릇을 다시 내미는 사이 전화를 넣었다. “엄마, 그때 정말 지겨웠지? 얼마나 힘들었어?” 칠순을 넘긴 어머니의 대답은 언뜻 목이 메어온다. “힘들긴, 너 보러 와주는 친구들이 고마웠지.”

그런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때 반고개에 있는 약국에 갔다고. 광역시가 된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반고개라면 그때는 대구의 북서쪽 종점에 가까웠다. 그곳에 소문난 약국이 있었다고. 도시의 동남쪽 범어동에 있는 우리 집에서는 거의 종점에서 종점까지였다. 어머니는 저녁 무렵에 혼자서 수없이 거기를 갔다고 한다. 괜찮은가 싶다가도 저녁이면 열이 오르는 딸을 뉘어놓고 얼마나 애를 태웠을까.

해는 뉘엿뉘엿 떨어지는데 버스로 40분은 걸렸을 그곳까지 가면서, 탈 때부터 내릴 때까지 누가 쳐다보건 말 건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는 40대의 어머니. 어느새 내가 그때의 어머니 나이 된 오늘에야 그 얘기를 한다. “엄마, 미안해. 난 몰랐어. 나 엄마 애 심하게 먹였네.” 나는 숫제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아니, 너 그때 안 죽고 살아줘서 가장 크게 효도한 거야." 다시는 국수 해달라면 안 되겠다는 듯 아이는 슬금슬금 제 방으로 들어간다. 나도 너처럼, 깨물면 아픈 어머니의 손가락이었단다.

경일대 외래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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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2월 0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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