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가운데 움직이는 정중동(靜中動)이 있다면, 움직이되 조용함을 유지하는 동중정(動中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몸을 격렬히 쓰는 스포츠 선수, 그중에서도 개인종목에 꼭 필요한 마음가짐이 동중정 아닐까 싶다. 그제 밤(한국시간) 열린 윔블던 테니스 주니어 남자단식 결승전 중계를 흥미 있게 지켜보았다. 두 선수가 1시간45분의 고독한 대결을 어떤 심경으로 치러냈을까 궁금했다. 한국 테니스 사상 첫 메이저대회 우승 기회를 아깝게 놓친 정현(17) 선수는 경기 후 “대기록에 신경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평정심을 갖고자 애썼다는 뜻이다.
하루 4~5시간씩 나흘 연속 다투는 골프대회는 말할 것도 없다. 체력과 기술은 기본이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잘 다스려야 좋은 성적이 돌아온다. 잘나간다 방심도 안 되고, 못나간다 낙심도 안 된다. 안달복달, 허둥지둥이 최대의 적이다. 63년 만에 3개 메이저대회 연속 우승이라는 기록을 세운 박인비(25) 선수가 ‘평온의 여왕(Queen of Serene)’으로 불리는 것은 여러모로 새겨둘 만하다.
검도에서는 사계(四戒), 즉 네 가지 마음상태를 경계하라고 가르친다. 놀람(驚·경), 두려움(懼·구), 의심(疑·의), 미혹됨(惑·혹)이다. 상대의 기합소리나 속임수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 판단과 능력을 믿으라는 것이다. 말이 쉽지 초심자로서는 좀처럼 들기 어려운 경지다. 평상시의 끊임없는 노력이 큰 경기나 비상 상황에서 평정심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골프든 검도든 초보자가 자주 듣는 ‘어깨 힘을 빼라’는 지적도 비슷한 맥락이다.
운동에서만 그럴까. 박인비도 아닌데 “평온은 나의 힘”이라며 ‘평온 에너지’를 강조하는 학자의 글을 며칠 전 읽었다. ‘세상의 모든 말과 눈과 손들이 잠시 쉬고 있는 그런 묵음(默音) 처리된 평온 속에서 나에게 필요한 자기 정화의 틈을 만드는 것이 이 험하고 고단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나만의 방법이라면 방법인데, 사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고백이다(최기숙, ‘평온은 나의 힘, 영성 수행자에게 듣는다’-단행본 『감정의 인문학』에 수록).
사회가 과거에 비해 안전해졌지만 왠지 불안감은 더 커졌다. 객관적 안전과 주관적 안심이 따로 노는 세상이다. 마음도 마찬가지. 평온을 잃고 허둥대는 경우가 늘었다. 그나마 샌프란시스코 공항 착륙 사고 때 눈물범벅이면서도 매뉴얼에 따라 승객 구조에 헌신한 ‘작은 소녀 같은 여승무원’에게서 안도와 희망을 발견한다. 평소 쌓은 평온 에너지가 비상 상황에서 제대로 발휘된 덕분인 듯하다. 만일 그녀를 포함한 승무원·승객들이 동중정 아니라 패닉 상태의 ‘동중동(動中動)’으로 행동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중앙일보 분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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