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우리의 일상생활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예쁜 것’은 비단 ‘풀꽃’만은 아닌 듯하다. 사물을 꿰뚫어보는 심미안을 갖춘 우리 선조들은 소박하고 절제하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들을 남겨놓았다. 때론 화폭, 때론 도자기, 그리고 때로는 자그마한 한옥의 구들방 한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본다. 열세 번째 순서는 문인화의 대표작인 <세한도>다. 포스코 <편집실>
9년 동안의 제주도 위리안치 유배생활 중 그린 작품 추사를 한결같이 따르고 섬긴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 예전 추사 작품과는 다른 ‘갈필’로 그린 화법 인상적 일본인에게 넘어간 세한도, 손재형 집념으로 되찾아
바싹 마른 붓으로 그린 갈필의 비밀
추사 김정희가 남긴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세한도(歲寒圖)>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마른 듯한 붓의 터치만으로도 그 내면의 건조함이 전해지는 그림이다. 먹의 풍부한 농담을 표현하는 대신 붓을 바짝 마르게 해 갈필(渴筆)로 그린 화법 역시 예사롭지 않다. 그런데 이런 화법은 예전 추사의 작품에서 볼 수 있던 유려한 선과는 확실히 다르다. 무엇이 추사를 변하게 한 것일까? 귀양지에서 느낀 세상의 매정한 인심이 붓마저 마르게 한 것일까? 물론 그런 면도 있겠지만 이와 관련된 재미난 뒷이야기가 있다.
추사가 제주도로 귀양을 가는 중에 있던 일이다. 귀양길에 추사는 전북 전주에서 71세의 서예가 창암 이삼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몰락한 양반의 후손으로서 약초를 캐서 팔아 삶을 연명하며 힘들게 공부를 하고 있었다. 붓과 종이가 없어 대나무와 칡뿌리를 갈아서 사용했고 모래 위에 막대기를 사용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평생 글씨에 대한 집념을 놓지 않던 그는 몸이 아프더라도 하루에 천 글자를 쓰지 않고는 잠을 자지 않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궁색한 살림에 좋은 붓은 그림의 떡이던 창암은 주로 값싼 황모필을 사용했는데, 황모필로 쓴 그의 글씨는 거칠고 다소 촌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런데 창암의 글씨에 대한 평을 추사가 부탁을 받게 된 것이다.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문화에 젖어 있던 추사로서는 도무지 좋은 평을 할 수 없었는지 “노인장께서는 시골에서 글씨로 밥은 먹고살겠습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창암의 제자들이 분기탱천하자 창암은 제자들을 말리며 “저 사람은 글은 잘 알망정 갈라지는 갈필의 맛과 조선 한지에 먹이 번지는 느낌은 모르는 모양이다”라고 말하며 말렸다 한다. 추사는 이렇게 창암에게 모욕을 주고 떠났다.
촌부의 거친 붓놀림을 업신여긴 추사였건만, <세한도>에서는 그때 본 거친 붓선이 생동하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이유는 세월이 흐르면서 당시에는 모르던 갈라지고 거친 갈필의 맛을 드디어 추사가 알게 된 까닭이다. 문헌에 남겨져 있는 바는 없지만, 그때 창암과의 만남이 추사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추사와 창암의 만남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추사가 유배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사죄하러 창암을 찾았지만 이미 그는 3년 전에 고인이 되었고, 추사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묘비명을 써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배지에서의 삶과 사제의 인연
<세한도>는 제주도에서 보낸 9년간의 유배 생활 중에 그린 작품이다. 탱자나무로 가시 울타리를 친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위리안치(圍籬安置)를 명받은 추사. 화순옹주(영조의 딸)의 부군인 월성위 김한신을 증조할아버지로, 정순왕후를 대고모로 둔 노론 명문가의 자손이자 꼿꼿하고 까다로운 성품의 소유자이던 추사에게 이 형벌의 시간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된다.
유배를 온 지 5년이 되던 해, 계절로 치자면 한겨울 엄동설한에 해당되는 시기에 추사는 이 작품을 그려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했다. 그런데 추사를 따르던 수많은 제자 중 왜 하필 이상적이었을까? 제목에 실마리가 있다. ‘세한’은 《논어》 <자한>편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를 인용한 말로,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른지 안다’, 즉 ’어려운 시절을 겪어봐야 진정한 벗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절해고도에서의 긴 유배 생활. 세력이 있을 때는 찾는 이의 발길이 잦았으나 유배 기간이 길어지면서 벗도 제자도 하나 둘 멀어졌을 것이다. 권세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세상의 인심을 뼈저리게 느꼈을 추사에게 한결같이 스승을 섬기고 받드는 이상적은 특별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역관이던 이상적은 청나라를 오갈 때마다 고관대작들의 이런저런 물품 구입 부탁을 외면한 채 스승을 위해 진귀한 책을 구해다주었을 정도로 스승을 생각하는 마음이 극진했다. 제자의 아름다운 마음에 깊이 감동한 추사는 <세한도>를 그려 선물함으로써 제자에게 감사와 애정을 표현했다.
격랑의 시간을 보낸 세한도, 기적적으로 살아남다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인연으로 시작된 <세한도>의 행로는 뛰어난 인재이자 명문가의 자손이면서도 유배지를 전전해야 했던 추사의 인생처럼 드라마틱하다.
이상적에게서 그 제자에게로, 다시 제자의 아들에게로 물려졌다가 평안감사 출신이자 휘문고 설립자인 민영휘 집안으로 팔려간 <세한도>는 역사의 격랑기인 구한말에 이르러 민영휘의 아들인 민규식이 일본인 추사의 최고 연구가 후지쓰카 지카시에게 팔아서 그 사람의 소유가 되고 만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무렵, <세한도>의 운명도 위태롭기 그지없었고, 나라의 보물이 일본으로 건너갈 것을 염려한 서예가 소전 손재형은 후지쓰카에게 그림을 팔 것을 부탁했다. 돈은 얼마라도 상관없다는 파격적인 제안이었지만, 후지쓰카가 그림을 양보할 리 없었다. 추사의 열렬한 애호가이자 연구자인 후지쓰카와 서예가이자 그림 보는 안목에 있어서 최고로 손꼽히던 손재형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후지쓰카 지카시는 1926년 경성제대 교수로 부임해 조선시대 실학자 박제가 선생을 연구하다 오히려 추사 연구에 빠져들었다. 그는 오랜 기간 서울 인사동과 중국의 베이징을 돌며 자료를 수집했으며, 가격이 너무 비싸 구매할 능력이 되지 않는 추사 작품은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겨뒀다.
일본의 패전이 점쳐지던 1944년 후지쓰카는 서둘러 한국 생활을 정리한 뒤 2000여 점의 추사 유품을 갖고 일본으로 귀국하고, 노심초사하던 손재형은 일본까지 찾아가 <세한도>를 되찾으려 했지만 두 번째 시도도 실패였다. 단단히 작심한 손재형의 선택은 후지쓰카의 집 마당을 쓰는 것이었다. 마당 쓸기는 두 달 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손재형의 의지에 감동한 후지쓰카는 “내가 죽으면 그림을 당신에게 주라고 아들에게 말해놓겠다”고 약속하지만, 손재형은 물러나지 않았다. 세 번째 대결에서는 후지쓰카가 두 손을 들었다. “당신이라면 이 그림을 가질 자격이 있다”라는 말과 함께 그림을 건넨 것이다. 이에 손재형이 세한도의 값을 치르려 하자 후지쓰카는 “선비가 아끼던 것을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 어떤 보상도 받지 않겠다, 대신 잘 보존만 해달라”라는 걸작인 말을 남겼다 한다. 그림을 사랑하는 이들만이 나눌 수 있는 불꽃 튀는 대결과 서로에 대한 이해를 엿볼 수 있는, 참으로 영화 같은 이야기다.
이렇게 극적으로 <세한도>는 귀국에 성공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이야기가 있으니, 그림이 한국으로 돌아온 지 두 달 후 후지쓰카의 집이 미군의 폭격으로 모두 불타버린 것이다. 후지쓰카가 수집한 귀중한 추사의 자료 2000여 점이 모두 사라지는 비극 속에서도 <세한도>만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다. 만약 손재형의 집념이 없었더라면, 후지쓰카가 끝까지 양보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그러나 <세한도>는 다시 한 번 풍파를 겪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세한도>만큼은 지키겠다는 후지쓰카와의 약속은 손재형의 국회의원 출마로 깨지게 된다. 선거자금이 부족하던 손재형은 사채업을 하는 이근태라는 사람에게 차마 팔지는 못하고 저당을 잡히나 국회의원에 떨어지면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해 그 시대 미술품 애호가인 손세기에게 팔려 지금은 그의 아들인 손창근의 소장으로 되어 있다. 이제는 우리에게로 돌아온 국보 제180호 <세한도>. 격랑의 시간을 보낸 <세한도>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노라면 인간의 의지와 의리 같은 고결한 가치들을 세우고 지키라는 추사의 추상같은 가르침이 들려오는 듯도 하다.
▲최웅철=문화평론가. (사)한국판화미술진흥회 총무이사, (사)한국화랑협회 국제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웅갤러리, 세라믹요 대표로 전주시 온브랜드 운영이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생활명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