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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 맥매스터 대학 교수
120년 전 비숍이 보았던 조선은 가난하고 무력한 나라였다. 조선인들은 대부분 초라한 움막에서 극빈하게 살았다. 인구 25만의 수도 서울은 베이징에 이어 세계에서 둘째로 더러운 도시였다. 비좁은 골목길 옆으로 초록빛 오물이 흘렀고, 굶주린 개떼가 어슬렁거렸다. 여자들은 온종일 남자들의 백의(白衣)를 빨고 삶고 풀칠하고 다려야만 했다. 그런 풍습은 비숍에겐 여성노예제(female slavery)로 보였다. 저녁 8시 보신각 대종(大鐘) 소리에 맞춰 모든 남자의 통행이 금지되던 ‘기이한 습관’의 나라, 김수영의 시구처럼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던 극적인” 서울이었다.
급류를 헤치며 한강의 뱃길을 둘러본 비숍은 조선의 절경에 경탄하지만, 그녀의 관심은 줄곧 일반 백성의 비참한 생활상에 머물렀다. 표독스레 담뱃대를 뻑뻑 빠는 양반들과 백성의 고혈을 짜는 아전들을 묘사한 장면을 읽노라면 소름이 끼칠 정도다. “양반은 담뱃대도 직접 들려 하지 않았고, 양반집 아들들은 서당에 갈 때도 책조차 손수 들고 가지 않았다.” 지주와 아전들은 강압으로 인민의 재산을 빼앗았고, 저항하면 투옥시키고 곤장을 쳤다.
사람들은 틈만 나면 취하도록 막걸리를 마셔댔다. 양반들은 양주까지 구해 마셨다. 술에 취해 정신을 잃어도 욕될 것 없던 ‘술 권하는 사회’였다. 요컨대 비숍이 기록한 조선 말기의 사회상은 처참했다. 열강의 틈에서 위기로 내몰린 정부는 무력했다. 사욕에 찌든 지배층은 잔혹했다. 연약한 백성들은 의욕을 상실하고 나태와 무기력에 내몰렸다.
유교 경전에 ‘천명미상(天命靡常)’이란 말이 있다. 그 가르침에 따르면, 하늘은 백성의 눈과 귀를 통해서 보고 듣는다. 백성이 도탄에 빠지면, 하늘은 천명을 거둬 다른 조대를 연다. 역성혁명(易姓革命), 즉 반란에 의한 왕조교체를 정당화한 유가의 정치이론이다. 유가경전에 기록된 고대의 독재자들은 모두 정치혁명의 결과 처형되었다. 유교의 원칙으로 보면, 조선은 마땅히 무너져야 할 나라였다.
신해혁명은 중국 현대사의 꽃이다. 쑨원(孫文)이 내건 공화정의 깃발 아래 반란군은 청조를 무너뜨리고 황권을 해체했다. 그 정치혁명으로 중국은 자력으로 ‘민국(民國)’의 시대를 열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혹독하리만큼 철저하게 전통을 비판했고, 왕조사의 어둠을 고발했다. 유교는 식인(食人)의 이념이라 폄하되었다. 마지막 황제는 옥살이를 면치 못했다. 불행히도 조선의 인민은 ‘민국’의 혁명을 이루지 못했고, 단명한 대한제국은 식민지로 전락했다.
김수영은 참혹한 조선 말기의 사회상을 보면서 정신적 방황을 거쳐 울부짖었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고. 부정의 부정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본 것인가. 거대한 뿌리를 발견한 김수영은 조선의 그 “더러운” 역사를 직시했던 것이리라.
조선왕조 비판은 친일(親日)일 수 없다. 왕실의 안전만을 보장받고 나라를 일제에 팔아 버린 조선의 지도부를 옹호하는 것이야말로 친일이 아닐까. 시카고대학의 커밍스 교수는 북한정권이 조선조의 연장이라 주장한다. 그의 진단대로라면 한반도에서 조선조는 여전히 지속되는 셈이다. 즉 조선의 극복은 현재진행형의 과제다. 식민사관을 넘어서기 위해선 조선왕조사의 모순과 한계를 철저히 비판해야만 한다.
**오늘자 중앙일보 삶의 향기란에 실린 글을 읽다가, 문창극 지명자의 교회 강연 내용이 오버랩되어 왔습니다.
한 시간 넘는 설교의 주제는 제가 보기에는 조선말부터 근 현대 한국전쟁까지 우리의 역사속에서 당한 수난사드이 오늘의 우리를 성숙케한 밑거름으로 인식한 후보자의 견해로 보였습니다. 친일'이나 '친미' '하나님의 뜻'이 침소봉대한 면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얼마나 얄팍하고 만만하게 보였으면 이렇게 오도되고 왜곡된 이야기들을 버젓이 매스컴에서 확대 재생산 하는지. 작금의 세태는 방향성도 없이 표류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여론에 호도되지 말고 내 중심대로만 생각하고 살면될까요. 어떤 말을 들었을 때 내 의견이나 내 말이 되기 전에 이말의 배면은 무엇이고 이 말속의 본질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말로 가장 피해보는 사람과 덕보는 사람을 생각해 봐야 겠지요.
누군가 내게 '카더라' 통신을 준다면 듣자마자 내 얘기로 만들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럴수록이 활개치는 것이 '말' 같습니다. 말의 '본질'을 따져서 적어도 저의를 한 번 뒤집어 보면 어떨까요. 칭찬은 상대를 향하지만 말하는 사람의 도량도 보입니다. 품이 없는 말, 균형감을 상실한 의견에 현혹되지 말았으면 합니다.
좌익이니 우익이니 선긋기 놀이 하지 좀 말고 본질을 먼저 볼 줄 아는 개인들의 인식이 시퍼런 칼날처럼 살아있다면 작금에 활개 치는 자들이 저리 확대 생산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가 어떻게 했길래 내가 어땠길래 저들이 저리 설치는 지. 한 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